[사설] 추상적인 ‘평화’에 허비한 시간과 그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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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18일 신년 기자회견을 두고 뒷말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중 ‘정인이’ 학대 사망사건과 관련해 문 대통령이 한 말은 ‘입양아 쇼핑’ 논란을 불렀다. 그러나 이보다 심각하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북한 문제와 관련,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분명히 있다”고 한 것과, 북이 중단을 요구한 한미연합 군사훈련에 대해 “북측과 협의할 수 있다”고 한 말이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1월 5~12일 개최된 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핵잠·전술핵 등 대남·대미용 핵개발을 공개 지시했다. 그런 와중에 ‘핵’을 무려 36차례나 언급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이 무슨 근거로 북이 비핵화 의지가 분명히 있다고 말했는지 궁금하다. 그냥 바라는 대로, 믿고 싶은 대로 말하는 것일까.

북한이 중단을 요구한 한미연합훈련을 “북한과 협의하겠다”고 밝힌 것도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다. 외교가에선 “한·미 훈련 조정은 북한이 아닌 미국과 논의해야 할 문제”란 지적이 나왔다. 한미연합훈련의 목적이 북의 남침 도발을 막기 위함인데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북과 협의할 수 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동맹국인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군이 적군과 내통하겠다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는 대목이다.

바이든 미 행정부가 전임 트럼프 정부의 싱가포르 회담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은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비논리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 미국과 북한 간의 좋은 관계가 딱 그때까지였다고 보는 문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 때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겠으나 바이든 행정부에게는 가장 지우고 싶은 과거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이 미국 바이든 행정부에 전임 트럼프식 대북정책을 이어받으라고 하는 자체가 “난센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나돈다. 미국 대선 과정에서 개표 부정 시비로 큰 상처를 남겼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선에서 패배하고 일부 지지자들의 국회 난입을 선동한 혐의로 ‘탄핵’의 궁지에 몰렸다. 그런 마당에 트럼프의 정책과 업적을 바이든 행정부 더러 계승하라고 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에 박근혜 정부의 정책과 업적을 이어받으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마이웨이’ 의지를 천명했다. 21일 국가안전보장회의 전체회의에서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는 온 겨레의 염원”이라며 “미국 바이든 정부와 함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진전을 위해 계속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한 것만 봐도 그렇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가장 신임하는 것으로 알려진 강경화 외교장관을 갑자기 경질하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설계자나 다름 없는 정의용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새 외교장관에 임명했다. 그를 앞세워 바이든 행정부 설득에 나서겠다는 일종의 마지막 승부수인 셈이다.

그러나 워싱턴 정가에는 정 외교장관 내정자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부풀려 전달하는 바람에 소위 트럼프식 ‘쇼 이벤트’가 시작되었고, 미국이 북한에 끌려 다니는 꼴이 되었다고 비판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그런 현실을 감안할 때 미국 내에서 한국의 새 외교장관의 역할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외교 전문가인 바이든 대통령도 싱가포르 회담 직후 “미국의 영향력만 더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문 대통령이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임기를 1년여 남긴 현실에서 원점으로 돌아간 남북, 미북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이것저것 따지기보다 일단 부딪쳐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막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는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국민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다. 백신 접종으로 조기에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차단하는 문제도 새 행정부의 커다란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문 대통령이 바라는 대북 관계의 진전이 중요한 문제이긴 하나 한참 후순위로 밀릴 수 있다는 얘기다.

장애물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총괄하게 될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 지명자는 지난 19일 열린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북핵 문제에 대해 “행정부마다 괴롭혔던 어려운 문제로 상황이 더 나빠졌다”면서 대북 정책의 전면적 재검토를 시사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수장들의 눈에 싱가포르 회담은 ‘계승’이 아닌 ‘청산’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정책의 문제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미국 내 여론은 국제정치 외교적 지각 변동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문 대통령도 이런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이 놓치고 있는 게 있다. 정작 미국이 주목하고 있는 대상이 북한이 아닌 한국 정부라는 점이다. 지난해 말 여당의 입법 폭주로 통과시킨 ‘대북전단 금지법’은 미국 정치권과 여론으로 하여금 동맹국인 한국에 대해 의문 부호를 찍고 있다. 미국 정치권과 여론이 문재인 정부가 유엔의 북한 인권 결의안에 계속해서 기권하는 등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할 뿐 아니라 최악의 인권 탄압국가인 북한 주민의 인권 침해에 가담하고 있는 게 아닌지 불신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 전체회의에서 “마지막 1년이라는 각오로 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 말에는 ‘그 동안 이룬 게 없고,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한 심정이 담겨 있다. 그러나 지난 4년의 시간은 어디가고 이제 마지막 1년에 모든 걸 쏟아야 하는지에 대한 손익계산이나 냉철한 반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은 우리가 벌어준 시간을 가공할 핵무기를 완성하는데 사용했고, 반대로 우리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한반도 평화’에 매달려 그 귀한 시간을 허비했을 뿐인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