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 유명 배우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이 발간된 적이 있었다. 꽃으로 때리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아프겠는가마는 배우는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러한 제목을 달았을 것이다. 최근에 가정에서, 공공시설에서 일어난 각종 끔찍한 아동 폭력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전 국민이 분노하였고,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꽃’으로도 때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폭력을 생각할 때 우리는 대개 ‘신체적 폭력’을 생각한다. 때리는 것, 꼬집는 것, 밀치는 것 등과 같은 신체에 가해지는 모든 해악이 이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사실 폭력은 이러한 신체적 폭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소위 ‘권력과 통제의 수레바퀴’라는 말에서 보듯이 일단 행해진 신체적 폭력은 연쇄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신체적 폭력을 당한 경우, 피해자는 ‘정서적 폭력’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폭력으로 인해 야기된 자존감 결여와 같은 결과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은폐된 공간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폭력이 더욱 숨겨지며 말이다. 이것은 폭력의 피해자들이 ‘사회적 폭력’을 경험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폭력’은 당연히 누려야 할 경제적 혜택으로부터 박탈되는 ‘경제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폭력의 연쇄과정에 이어진다. 즉, 폭력이라고 할 때 우리는 대개 드러난 신체적 폭력만을 보게 되지만 – 때로는 이것도 은폐되고 후에 공분을 사게 되지만 – 사실 폭력은 연쇄작용처럼 한 개인을 총체적으로 파멸해 가는 일종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폭력의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것이 바로 ‘정서적 폭력’이다. 그래도 ‘신체적 폭력’은 어떠한 형태로든 외관으로 노출될 가능성이 조금이라고 있는 가시(可視)적인 폭력이다. 그런데 정서적 폭력은 쉽게 눈에 띠지 않으면서도 한 개인의 자존감, 한 개인으로서의 고귀한 존재감을 무너지게 하는 보이지 않는 끔찍한 폭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적 폭력이 장기적으로 가해지면 그 개인은 심리적인 힘을 키우지 못하게 되고, 만성적인 좌절감과 낮은 자존감, 수치심으로 삶의 생생함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서적 폭력을 야기하는 중요한 도구와 과정이 바로 ‘언어폭력’이다. 상대방의 자존감을 낮추게 하거나, 욕을 하거나, 무시하거나, 비웃는 모든 것이 이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신체적으로는 한 대도 때리거나 맞지 않았지만, 한 개인의 인격을 무너지게 하고 성장을 저해하는 정서적 폭력, 그 안에 언어폭력이 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정서적 폭력과 언어폭력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행위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 5장 22절)” 형제에게 화내는 것, 분노를 폭발하는 것, 무시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것 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만한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에 대해 무시하는 말로 부르는 것이 지옥에 들어갈 죄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물리적인 해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로서 때리는 것도 절대 하지 말라는 주님의 엄중한 경고가 들어있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는 드러난 모습으로 판단되지만 그 행위의 기저에는 그 가해자(행위자)의 의도가 반드시 들어있다. 즉, 타인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그에 대해 때리거나 욕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행위는 의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타인을 무시하고 비난하면서 그에 대해 정중하게 대할 수도 없다. 설령 그러한 태도를 일시적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야말로 일시적일 뿐 아니라, 상대방도 존중받았다고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영적인 존재로 상대방의 행위 뿐 아니라, 그 의도를 알아챌 수 있는 민감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선한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악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이전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가 어떠한가를 늘 점검해야만 한다. 드러난 행위가 타인에게 유익이 되고 적어도 해악을 끼치지는 않았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주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에 ‘뼈를 맞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아마 뭔가 자신의 본질적인 실체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뭔가 열심히 하는 일에 대해 ‘영혼을 갈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영끌’ -영혼을 끌어모았다-을 했다고도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간절하지만 무서운 표현들이다. 우리의 황량하고 우울한 마음을 담고 있는 표현이 되겠다. 우리 사회에 ‘내로남불’이라는 표현은 이미 하나의 상용어구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 블루’에 이어 ‘코로나 레드’ ‘코로나 블랙’이라는 신조어도 나왔다고도 한다. 언어는 한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일단 이러한 언어가 통용되면 그 언어가 주는 세력이 있어 그 사회를 규정하는 도구나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우리가 만들지만 일단 만들어지는 그 언어는 다시 우리를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고 무시하는 말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져서 상대방에게 표현될 수 있지만, 일단 그 표현된 언어는 그 사람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다시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돌아와 나 자신과 우리 관계를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그렇다, ‘말’로도 때리지 말아야 한다. 꽃은 아름답고 우리를 겸손하게 하며 미소 짓게 하는 창조주의 고귀한 피조물이다. ‘말’도 그렇다. 태초에 말씀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해보라. 성경의 ‘말’로서 날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하루 산다고 자부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세상에 이 하나님의 빛을 증거 할 자로 하나님의 말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마음과 의도로 세상을 지을 작정을 하시고 말씀으로 이 천지를 지으셨는지, 어떤 마음과 의도로 나와 내 이웃을 지으시고 ‘심히 기쁘다’고 하셨는지, 그리고 복음서에서 어떤 마음과 의도로 형제에 대해 노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다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말로 때리지 않을 뿐 아니라 말로 어떻게 살릴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말이 사람을 파괴적으로 할 수 있는 무기라면, 말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최고의 치유제도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말, 부정적인 말이 난무한 세상이다. 방송이나 sns의 기사들은 온갖 근거 없는 비방과 욕설로 도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세상에 마음의 중심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원치 않게 언어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또 나도 모르게 가해자(행위자)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잘 정돈되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때이다. 내 마음의 숨은 의도, 생각, 불안 등을 잘 들여다보고 이러한 혼란한 마음이 내 입술로 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말로서 때리지 않을 뿐 아니라, 말로서 타와 타인을 살리는 주님의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자.
이경애 박사(이화여자대학교 박사(Ph.D), 이화여대 외래교수, 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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