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삶이란 만인을 사랑하는 삶이다. 거룩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이웃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의 정의를 위해 불의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자와 장애인,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을 돕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탐욕과 이기심을 극복하는 삶이다.
예수님은 원수를 갚아선 안 되며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5:43-44). 또한 율법 전체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으로 요약된다고 말씀하셨다(마 22:37-40). 그분은 이 말씀을 레위기 19장에서 끌어오셨음이 분명하다. 요컨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레위기 19장이 말하는 거룩한 삶이다.
빛이 없는 지구는 그저 암흑의 얼음 덩어리일 뿐이다. 그런 태양이 달과 별의 아름다운 존재를 위해 물러선다는 것이다. 해가 져야 세상이 밝아진다는 이 시의 역설은 자연스럽게 십자가의 역설로 이어진다.
해가 져 줘야 우리가 쉴 수 있는 밤을 맞이할 수 있다. 지구를 위해 기꺼이 매일 져 주는 해처럼 반드시 져야만 승리하는 신비한 역설이다.
'No cross, no crown'(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이 말은 'No sweat, no sweet'(땀이 없으면, 달콤함도 없다)이나 'No pain, no gain'(수고가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대가(代價) 없이 된 대가(大家) 없다'는 식의 말들을 파생시켰다. 그러나 원 속담은 이렇게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십자가 고난으로 얻은 영광의 면류관은 왕의 금관이 아닌 '가시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곳으로부터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약 800미터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가시관을 쓰고 채찍질을 당하며 걸어 올라가야 하는 저주의 길이었다. 군중들이 침을 뱉고 야유하는, 온갖 조롱과 멸시 가운데 무거운 나무 형틀을 직접 짊어지고 올라가야 하는 가시밭길이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 끝,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섰다. 십자가를 져야만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이 역설의 현장. 오로지 가시로 가득한 길을 통과해야만 꽃길에 도달할 수 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포기하고 싶은 길이었지만, 그 길이 꽃길임을 아셨기에 그분은 묵묵히 걸어가셨다.
성만찬으로 기념되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지금도 그 효력이 지속된다. 포도주로 상징되는 피는 모든 세포를 생명의 양분으로 흠뻑 적실 뿐 아니라 축적된 노폐물과 찌꺼기마저 거두어 간다. 비유를 이어 가자면, 회개의 행위를 통해 각 세포는 기꺼이 피의 정화 작용을 받아 누린다. 회개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켜켜이 쌓인 독소가 풍기는 악영향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을 위해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당신의 험담과 정욕과 교만과 둔감함 때문에 찢기신 그 몸이 이 모든 죄를 제하고 대신 새 생명을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