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볼 때 놀라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의 하나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모습을 볼 때이다. 바리새인들은 기도와 금식 등 여러 율법의 행위에서 흠 없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러한 모습은 행위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임을 본다. 그런데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완벽한 종교 행위보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겉모습을 칭찬하시기는커녕 몹시 꾸짖으신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이야 워낙에 예수님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위선과 행위적 신앙을 문제시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금식과 규칙적인 기도, 구제와 행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의의 기준에 도달할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될까? 아니, 바리새인까지 멀리 갈 것도 없다. 종교가 있든 없든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공공의 선을 행하는 것, 타인을 구제하는 것 등은 얼마나 고귀한 행위인가? 게다가 우리 주변에서 주님의 제자다운 선행으로 타인의 귀감이 되는 경우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되는가?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이러한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우선적 관심을 두기보다 그 행위의 의도를 더 중요시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은 드러난 행위 자체보다 행위자의 의도에 더 관심을 두시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준수는 매우 중요하지만, 예수님은 살인의 범위를 단지 ‘물리적인 살인’ 그 자체에 국한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향하여 화내는 것, 속으로 무시하는 것, 겉으로 무시하는 말을 하는 것까지 확장하시며 금하시는 것을 본다. 심지어 마음으로 결단하고 제단 앞에 제물을 드리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결단이건만, 인간관계에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제물을 바치면서 하나님과 해결하려고 하려기 전, 우선 형제와 화해하고 올 것을 당부하신다(마태복음 5장 21-25절). 분명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 것이거나, 형제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일진대 예수님은 이에 속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마음, 그 의도를 더 중시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의도를 중시하는 것, 그리고 보이는 행위 이면의 그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은 내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타인을 이해하는 것 모든 면에서 매우 어렵고 성숙한 훈련을 요한다. 전문 상담사가 되는 과정에는 많은 훈련이 요구되는데 크게 이론과 실습으로 나뉠 수 있겠다. 이론이라고 함은 말 그대로 많은 마음과 관련된 내용들을 습득하고 공부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상담사가 되는 과정에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고 또 짧지 않은 과정이 요구되는 과정이 바로 수련과정이다. 이 과정에서는 상담에 온 내담자의 말과 몸짓, 눈짓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 공감한 것을 성숙한 언어와 태도로 전달하는 전(全) 과정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초보자에서 전문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훈련과정이 바로 공감의 과정이다. 예를 들어, 상담에 온 내담자가 ‘저는 정말 돌아버릴 지경 이예요’ 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받은 복이 얼마나 많은데 헤아려 보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 상담사 입장에서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공감이라기보다는 훈계와 명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상담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공감적 태도를 표현하려고 한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돌아버릴 지경이시군요’ 라고 반응할 수 있다. 나쁘지 않다. 내담자의 말을 그대로 거울처럼 받아서 반영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응은 나쁘지 않지만 공감을 잘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틀리지는 않았지만 가산점을 주기는 어려운 반응이라고 할까? 상담사로서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풍성하지는 않은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더 공감적인 반응은 그 사람의 심정에 대한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몹시 화가 나신 것처럼 보이네요’ 혹은 ‘마음이 많이 힘 드신 가 봅니다’ 이렇게 반응할 수도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어떠한가? 첫 번째 반응이 내용 혹은 사실(fact)에 대한 공감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반응은 과정 혹은 감정, 느낌(feeling)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상담에서는 후자의 반응을 더 성숙한 상담사의 반응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깊은 공감 반응이 있다. 그것은 미처 내담자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심정, 즉 그의 의도와 욕구를 알아차리고 대신 그 마음을 읽어주는 반응이다. ‘뭔가 이해받지 못해 마음이 많이 상하셨군요.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식과 같이 나 자신도 다 알 수 없는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읽어주며 내가 말하고 싶은 의도를 공감해 줄 때(focus), 그 상담사는 깊은 공감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겉이 아닌 속을 읽어줄 때 상대방 또한 깊은 공감을 받았다는 안도와 위로에 힘을 얻고 다시 새롭고 창조적이며 적응적인 대처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발견하는 것, 그 과정이 바로 전문적인 상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계셨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은 감히 꿈꿔 보지도 못할 도덕성과 종교성을 갖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행위에 속지 않으시고 그들의 의도에 분노하신다. 그런데 이 뿐 아니다. 예수님은 비록 인간 조건으로는 무시 받고 배척받을만한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 의도가 믿음과 헌신에서 나온 것이라면 기꺼이 그 마음을 받으시고 인정하시는 것 또한 우리는 본다.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붓는 행위, 율법에 부정하다고 정죄된 질병에 놓인 여인이 예수님에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행위를 칭찬하시는 사건 등 우리는 복음서에서 율법과 고정관념, 사람들의 판단기준과 다른, 그러나 간절하고 순수한 의도에서 나오는 믿음을 알아보시고 다소 미숙한 행위를 칭찬하시며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한다.
사람은 인정이 필요한 존재인지라 자신의 선행이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 자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의로움을 알아주는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리새인의 의가 아닌 주님의 의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우리의 믿음의 행위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작은 선행에도 골목 어귀에서 마다 크게 소리 지르며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 주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다소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깊은 신뢰의 관계에서 나오는 믿음의 행위, 나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만 아는 헌신과 수고, 이러한 것이 축적이 될 때 우리는 더 주님과 가까워지고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아닐까?
외로움과 고독은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를 갖는다. 외로움(loneliness)이란 그야말로 세상 천지에 나 혼자 있다는 절대적 결핍과 박탈감이다. 사람은 외로움이 깊어지면 여러 심리적인 문제를 갖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그러나 고독(solitude)은 다르다. 고독은 외로움과 달리 일종의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주님과 나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방해되지 않고 깊은 사랑과 신뢰를 경험할 때 사람은 겉으로는 혼자 있지만, 그 마음으로는 누구보다 충만하다. 이럴 때 누구도 인정하지 않지만 깊은 든든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새해에는 사람사이에서도 깊은 공감을 하는, 보이지 않는 외침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혼돈 속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되자. 우리의 겉 사람은 장기화된 팬데믹과 여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소음 속에 피곤하지만, 이럴수록 우리의 속사람은 더 깊은 주님과의 고독한 관계를 즐길 수 있길. 그래서 보이는 날마다의 상황 속에서 허둥대지 않고 묵직한 신뢰로 버텨내기를. 올해는 우리 모두 속사람이 더욱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경애 박사(이화여자대학교 박사(Ph.D), 이화여대 외래교수, 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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