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도의 깊이와 자리

오피니언·칼럼
설교
홍석균 목사

본문 : 마가복음 14장 32-42절

심리 장애를 겪는 자들이 문제를 푸는 방식 중에 잘못된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타인을 공격하는 방식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는다. 환경을 탓하고 주변 사람을 공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대표적인 질환에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 둘째는 자기를 공격하는 방식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비관하고 분노를 속으로 삭인다. 이러한 자들의 대표적 질환이 강박증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 해결 방식은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자신을 찌르고 남도 찌르는 가시밖에 되지 못한다.

반면 오늘 예수님은 문제 해결 방식이 달랐다. 타인과 자신을 공격하거나 문제를 회피 또는 상황에 도피하지 않으셨다. 문제를 담담히 직면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큰 고통을 34절에 표현하고 있는데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 고통의 깊이와 크기는 죽음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탓하거나 상황에서 도피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문제 해결 방식은 무엇이었나?

첫째, 기도의 깊이를 가지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위기 앞에서 오직 겟세마네를 찾았다. 겟세마네를 찾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지명의 의미를 보면 알 수 있다. 겟세마네는 감람산에 있는 동산으로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눅가복음 22장 44절에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즉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마치 기름을 짜듯이 진액을 짜며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기도의 절절함은 35절에 다르게 표현되었는데,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표현은 깊은 기도의 자리를 함의하고 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의 문제를 풀 수 있었던 유일한 키는 바로 기도의 깊은 자리였던 것이다.

여러분들은 기도의 절절함이 있는가? 깊은 기도의 자리에 나가고 있는가? 기도의 절절함이 있는 자들은 반드시 깊은 기도의 자리에 나아간다. 한 사람의 신앙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기도의 깊이를 보면 신앙의 깊이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아무리 청산유수처럼 말을 잘한다 할지라도 기도의 자리가 없다면 그 사람은 오래가지 못한다. 목회자들도 기도 없이 설교를 잘하는 것은 사람을 충동시킬 수 있으나 하나님은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기도하는 자들은 하나님까지 감동시킨다. 깊은 기도의 자리에 나아 가시길 바란다. 깊은 기도의 시간을 정하고 기도의 장소로 나가시길 바란다.

기도를 말할 때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것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하는 사람이 있다. 기도는 무시로 기도하는 것이지 굳이 시간과 장소를 정해야 해야 하냐고 힐난한다. 출근할 때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하면 되지 않냐고 한다. 물론 그러한 기도를 받으신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기도하지 않는 자들의 핑계이다. 예수님도 치열한 삶 속에 겟세마네라는 장소와 새벽 미명이라는 시간도 정하셨는데, 기도의 장소와 시간을 가볍게 핑계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지금 이곳, 기도의 이 시간이 문제와 상황을 뛰어넘는 능력이 되길 축복한다.

둘째,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일차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2절에 “내가 기도할 동안 여기 앉아 있으라”. 여기 앉으라는 단순히 ‘기다려라’의 의미가 아니라 여기 앉아 기도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2차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좀 더 나가서 34절에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는 말은 깨어 기도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37절에 기도의 자리에서 잠깐 돌아오셨을 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예수님은 한 시간도 깨어 기도할 수 없느냐 책망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오셔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41절 “이제는 자고 쉬어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왜?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릴 때가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자들은 기도의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다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훈련을 시키실 때가 있다. 또는 열심히 헌신하게 하실 때가 있다. 때로는 쉼을 주실 때가 있다. 어떨 때는 훈련과 쉼을 같이 주시거나 훈련과 헌신을 함께 요구하실 때가 있다. 훈련받고 헌신해야 해야 할 때 쉬겠다고 해서 안 되고, 쉬라고 하시는데 헌신하겠다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는 기도할 때가 있다. 여러분에게 지금은 무슨 때인가? 그 어느 때 보다 기도할 때이다. 여러분의 힘으로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는가? 가족의 구원이 해결되는가? 관계의 문제를 여러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나? 이 나라와 민족의 문제가 우리의 힘으로 해결되는가? 기도할 때이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께 엎드려 기도하신 것이다. 때로는 세상에서 부재, 결핍, 상실, 고통을 경험한다. 그때가 바로 기도할 때이다. 이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길 바란다. 그때 드리는 기도가 유일한 생명줄이 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두 종류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을 외친 선지자였다. 둘째는 ‘위험하다. 위험하다’. 위험을 외친 선지자였다. 언뜻 보기에는 전자가 고상해 보이고 후자가 부담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평안을 외쳤던 자들은 백성들과 함께 멸망했다. 반대로 위험을 외쳤던 선지자는 자신뿐 아니라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 주께서 우리에게 지금 말씀하시고 계신다. “기도하라. 기도하라“. 그 기도가 위험을 기회로, 위기를 축복으로 바꿀 것이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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