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펜젤러와 존스의 순행 중 원주 방문 기술에 관한 몇 가지 문제
4-1. 원주 방문에 관한 년도와 날짜 문제
필자가 2020년 10월부터 <기독일보>와 <선교신문>에 ‘1889년 존스와 아펜젤러의 남부순행 일기’를 번역 기고해 4회에 걸쳐 연재하다 보니 1929년 발행된 KMF 1월호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순행기 제목에 1889년 연도 표기가 1888년으로 잘못되어있었다.
1985년 출간한 이만열 교수의 책 『아펜젤러-한국에 온 첫 선교사-』 329쪽 각주 오류는 그가 2015년 발간한 『아펜젤러-조선에 온 첫 번째 선교사와 한국 개신교의 시작 이야기』 개정판에서는 연대가 잘못 기재된 각주를 뺌으로써 더 논의가 필요 없다. 필자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존스의 순행 날짜와 요일을 만년력으로 검토해본 결과, 그들이 주일을 맞은 곳은 순행을 떠난 셋째 날 분명 원주가 아닌 지평에서 1889년 8월 18일 일요일을 맞았다. 또한 존스의 순행일기와 아펜젤러의 순행일기에서도 분명 원주가 아닌 지평에서 주일을 보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2. 원주에서 머물렀던 장소 문제
1889년 당시 강원도 원주에는 강원도 관찰사(감사)가 집무를 보는 강원감영과 원주목 목사가 집무를 보는 원주목 아관이 따로 있었다. 원주감영과 원주목 아관에 관한 역사 자료를 원주박물관과 원주문화원을 통해 구할 수 있게 되어, 두 분 선교사가 1889년 8월 원주 순행 당시의 상황을 사료에 근거해 상세히 조사해 보았다.
당시 강원감영 관찰사는 정태호(鄭泰好)였으며 정태호는 황해도 관찰사를 마치고 강원도 관찰사로 1886년 부임해와 고종27년(1890)까지 역대 관찰사 중 가장 오랜 기간인 3년 8개월을 재임 후 지춘추관사로 입조했으며, 이후 이조판서와 공조판서를 두 차례씩 역임하였다.
또한, 당시 원주목사(原州牧使)는 이철우(李澈愚)였는데 이분은 조선시대 원주의 마지막 목사로 1889년 3월 9일부터 1890년 10월 14일까지 재임했다. 존스의 순행기에서 선교사들을 초청한 관리는 원주목사였으며 원주 도착 첫날 환영을 해준 분도 원주목사 이철우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존스는 그들이 예방했던 두 관리의 관직을 관찰사(Governor)와 목사(Mayor)로 영문으로 분명히 다르게 표현했다.
첫날 이들이 묵었던 원주에서의 숙소에 관해 지금까지 강원감영이 있는 널찍한 별관에서 묵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존스의 순행기에 숙소는 원주목 관아 별관(객사)을 사용했으며 다음 날 관찰사를 예방한 후 선교사들은 다시 원주목 관아 별관(객사)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충청도로 출발했다.
또한, 당시의 원주목 지도를 보면 객사는 강원감영과 원주목 아관 내부가 아닌 말을 타고 1~2분 거리(현재 제일은행 원주지점 인근) 별관에 학성관(鶴城館)이라 불리는 객사가 있었다.
4-3. 원주 방문 활동 오류 자료의 재인용 문제
두 분 선교사의 원주 방문 내용 중 처음 오류 자료를 만든 이는 한국에 한 번도 와보지 않고 일본에서 수집한 자료에 근거해 아펜젤러 전기 『A Modern Pioneer In Korea』를 집필한 그리피스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가 기술한 아펜젤러와 존스의 남부여행을 기술하면서 원주를 방문하기 전 충청도 동쪽 이야기, 그리고 순행 중 잠잘 곳을 얻지 못해 고생했던 이야기 등 아펜젤러가 1889년 2월에 순행한 공주, 내포 이야기가 함께 나오기 때문이다.
존스가 기록한 1889년 8월의 남부순행 기록을 보면 분명 이들은 외부(外部)로부터 발행된 호조(護照)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순행 기간 중 그들이 원하면 언제든 지방관청의 객사에서 묵으며 지방관청의 편의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호조를 가지고 여행하는 외국인은 지방관청의 협조를 받아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아펜젤러는 고종의 커다란 신임을 받고 조선에서 최초의 교육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지방 관리들의 영접과 대접은 순행기에서 보듯이 극진했다.
5. 정확하지 않은 2차 자료 인용으로 인한 교회사 왜곡의 우려
5-1. 원주제일감리교회 “홈페이지 역사보기” 및 원주제일교회 100년사의 “원주제일교회 역대기(년표)”, “원주제일감리교회 100년사 화보” 연표 등 3가지 자료를 보면 “1888.8 강원도 감영이 있는 원주를 첫 방문한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는 관찰사와 면담을 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도착 다음날 주일을 맞아 두 사람만으로 예배를 드림. 관찰사 면담 때 두 선교사는 ‘사도위원회(Apostolic Committee)’라 지칭함.”이라고 세 곳에 모두 잘못 소개되어있다. 잘못된 2차 자료를 인용해 1889년을 1888년으로, 그리고 감영이 있는 원주에서 주일을 맞지 않았음에도 강원감영 객사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는 기술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5-2. 자료의 픽션화 경향
기독교타임즈 신문 2002년 6월 21일 자에 실린 아펜젤러 가족 방문 기사 “아펜젤러 임시 숙소 원주감영 방문” 기사를 보자.
“지난 12일 아펜젤러 후손들은 원주로 내려가 아펜젤러가 3일간 머물렀던 원주감영을 둘러봤다. 이곳은 아펜젤러가 당시 동학난 등으로 한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 원주 감사의 초청으로 원주, 제천 등 지역 선교와 화전민 선교를 염두에 두고 방문했던 곳이다. 현재까지 건물 6채가 강원감영사적공원으로 그대로 잘 보존되어 후손들은 내부 방까지 둘러볼 수 있었다. 22명의 후손 중 노블의 손녀인 캐롤린(Carolyn Noble Cogan)은 이곳을 돌아본 후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전통적 집과 방의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어 매우 새롭고 흥미로웠다. 특히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아마 원주시 초청 행사로 방문했을 아펜젤러 후손에게 조부 아펜젤러가 묵었던 곳이 현재 강원감영 사적지 공원 내에 있는 숙소가 아니라 감영 밖에 있던 객사에서 묵었었고, 또한 원주에 머물렀던 기간은 3일이 아니라 1박 2일이었음을 알렸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펜젤러의 손주들은 당시 남부 순행기 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료에 근거한 정확한 내용을 전하는 것이 잘못된 인식의 확대를 막을 수 있으리라 본다.
5-3. 전거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임의 수정 문제
윤춘병 감독께서 2003년 집필하신 『여주중앙교회100년』, 2003, 122쪽에 기술한 초기선교 과정에는 “1887년 서울에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한 아펜젤러 목사는 1889년 3월 존스(G.H. Jones, 조원시 1867~1919) 선교사와 동행하여 충청도 동쪽(이천,여주)을 지나 원주, 제천, 안동을 거쳐 부산까지 순회전도여행을 다녀온 일이 있다.”라고 그리피스의 아펜젤러 전기 내용을 소개했다.
여기서는 원전에 없는 이천, 여주, 그리고 남부 순행 코스에 없던 제천까지 넣어 남부순행 여정을 설명하였다. 한국감리교회 역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하시고 원로 목사이신 윤 감독님이 집필하신 내용이라 소장 학자들이 그 오류를 지적하지 않은 것 같은 의구심이 든다.
분명 존스의 순행기록에 나타난 1889년 8월 서울에서 원주까지의 순행 경로는 숙소를 떠나 동대문을 거치고 양평→지평→원주에 도달했다. 한강 둑을 따라, 그리고 원주 근처에서는 계곡을 지나갔기에 지리적으로 양평, 지평을 지나 다시 돌아가는 이천→여주→원주 경로는 생각할 수 없고, 또 존스의 순행일기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 않다.
위와 같은 문제는 2007년 김영명의 기고문에서도 발견된다. 김영명은 “한국감리교회의 토대를 놓은 선교사, 존스”, <기독교세계 2007년 12월호> 52쪽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888년 5월 14일 젊은 나이인 21세에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내한 선교사 중에 최연소였다. 1888년 8월 아펜젤러와 함께 원주, 충주, 청주, 대구, 부산까지 전도여행을 하면서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였다.”
여기에서 도착 날짜는 그리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필자가 살펴본 존스의 편지에는 한국 도착 후 당시 북감리회선교부 총무 리드(Dr. Reid) 목사에게 보낸 그해 5월 19일 편지에서 존스가 한국에 도착한 날이 1888년 5월 17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위에 있는 1888년 8월은 다른 책의 오류와 마찬가지로 1889년으로 고쳐야 하고 전도여행 중 청주가 포함된 것은 경로에서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계속>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