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확보 전쟁에서 뒤처진 이유는 백신 개발 전망 오판, 'K방역'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사후 책임 문제 우려, 저렴한 백신 고집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백신 개발 전망 오판...애초 2021년도 예산안 백신구입비 '0'
지난해 여름부터 미국, 유럽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백신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지난달 초부터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유럽연합(EU) 등이 백신 접종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지난달 31일 총 5600만명 분의 코로나19 백신 도입을 위한 계약을 겨우 마쳤을 뿐 실제 물량이 도입되는 시기, 접종 순서·시기 등 접종 계획은 아직 미정인 상태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연내 백신이 개발돼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 문재인 대통령의 사인을 받고 정부에서 지난해 9월 초 제출한 2021년도 예산안에 코로나19 백신 구입비가 전혀 편성되지 않은 것이 이를 방증한다. 야당에서 문제를 제기해 9월 말에야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4차 추가 경정예산으로 1839억원, 2021년도 예산안으로 9000억원이 반영됐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백신 구입비가)내년도 예산안에 없었던 것은 정부와 여당에서 백신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는 얘기"라면서 "K방역 홍보비로 1200억 원을 쓸 것이 아니라 진작 예산안에 (백신 구입비를) 포함시켰으면 이렇게 (백신 확보에) 뒤처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겨울철 대유행 예고됐지만... K방역 심취해 '백신없는 겨울'
K방역에 대한 과신도 한국이 백신 확보 전쟁에서 뒤처진 한 요인이다. 영국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백신 접종을 시작한 지난달 8일 정부는 백신 4400만명 분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중점을 둔 K방역 성과에 심취한 나머지 코로나19를 근본적으로 종식시킬 백신의 중요성을 간과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달 20일 "백신 태스크포스를 가동한 7월엔 국내 확진자 수가 100명 수준이어서 백신 의존도를 높일 생각을 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말해 정부의 K방역에 대한 자만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해석이 나왔다.
또 전문가들은 겨울철 대유행 가능성을 예고했지만, 정부는 K방역을 과신하다 주요국인 영국, 미국, 일본, 싱가포르 등과 달리 백신없는 겨울을 맞이했다.
김우주 고려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겨울 대유행에 대비하라고 경고했고, 코로나19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결국 백신이라는 지적이 잇달았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백신 담당 공무원 11월 말 면책결정..."면책 특권 줘야"
공무원들은 감사나 징계 처분 등 불이익이 두려워 백신 확보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과거 감염병이 돌았을 때 겪었던 트라우마 때문이다. 2009년 4월 신종인플루엔자(신종플루) 유행으로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가 백신 2400만명 분을 도입했다 700만명 분(약 700억 원 가량)이 남자 담당 공무원이 징계 직전까지 갔다가 전재희 장관이 나서면서 모면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코로나19 백신 확보를 담당할 공무원에 대한 면책 결정도 지난해 11월에야 나왔다. 질병청은 지난해 11월27일 감사원으로부터 '백신을 선구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확인한 직후인 11월 말에서야 아스트라제네카와 최종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백신 도입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담당 공무원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면책 특권'을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질병관리본부장을 지낸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정기석 교수는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면서도 "민관합동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의사결정을 해나가면 공무원이 책임을 지거나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가령 중대본(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본부장(정세균 국무총리)이 책임지고 수시로 보고 받으면서 일을 해나가거나 싱가포르나 미국처럼 국가차원에서 지시하면 공무원이 이행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값싼 백신 확보 몰두...다양한 백신 조기 확보 실패
정부가 가격이 저렴한 백신 확보에 몰두하다 다양한 종류의 백신 조기 확보에 실패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질병청이 지난해 무료로 접종할 독감 백신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저가입찰을 고집하다 사상 초유의 독감 백신 접종 중단 사태를 야기했듯 백신 개발 초기 효능과 안전성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격이 저렴한 백신을 우선 구매하려 했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백신 1회분 기준 모더나 백신 가격은 32~37달러(약 3만5000~4만1000원)다. 화이자와 얀센은 각각 19.5달러(약 2만1500원), 10달러(약 1만900원)다. 반면 지난해 11월27일 정부가 가장 먼저 계약을 체결한 아스트라제네카(1000만명 분)는 3~5달러(약 3000~5500원)에 불과하다.
정부는 아스트라제네카를 시작으로 지난달 23일 화이자(1000만명 분), 얀센(600만명 분)에 이어 같은달 31일 모더나(2000만명 분)와 계약을 체결했다. 코로나 백신 공동·구매 배분을 위한 국제 프로젝트 '코백스 퍼실리티'(1000만명 분) 백신까지 합치면 현재까지 총 5600만명 분의 백신을 확보했다.
업계 관계자는 "해마다 정부는 무리한 저가 입찰을 고집해왔고, 사상 초유의 독감 백신 접종 중단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며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상황에서 글로벌 제약사들이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길 원하는 한국에 먼저 공급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