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시 81편 1-4절).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경배는 예배를 통해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예배는 기쁨이고 섬김이고 나눔이다. 이스라엘의 예배는 민족 정체성에서 비롯된 공동체의 신앙고백이자 신앙행위였다. 무엇보다도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율례이자 이스라엘이 준수할 규례였다. 특히,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반영된 예배의 본질과 초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본 시편이 담아내는 예배는 이렇다. 이스라엘의 예배는 그 초점이 오로지 하나님께 맞춰져 있다. '하나님을 향하여'(1절)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이 예배라는 사실을 명확히 조명한다. 예배는 반응하지 않는 관객에게 응답을 강요하는 자극 무대가 아니다. 이방의 제사처럼 신비(심리)기술로 몽매한 사람들을 환각에 빠뜨리는 것도 아니다. '예배형식'을 빌어다가 세속문화를 혼합한 쇼(show)는 더더욱 아니다.
이스라엘의 예배에는 현대화된 화려함은 없지만 담백함과 순수함이 두드러진다. 오늘날 극도의 기술과 장치를 구비한 현대화된 예배에서는 볼 수 없는 투박함과 진솔함이 눈에 띤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해 '즐거이 소리칠(반응할)' 여유가 있으며 자발적인 신앙 고백(시를 읊으며, 2절)의 여지도 보인다. 인간의 모든 기술적 장치에는 인위성과 의도성이 숨겨져 있다. 그런 장치로는 신앙의 본질 요소인 자원성(自願性)과 자연성이 발현되기 어렵다. 하나님을 향한 자발적 마음이 전제될 때 공동체의 예배는 신앙의 역동성을 증진시킨다. '하나님을 향한' 초점이 틀어질 때 예배의 본질은 훼손된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자발적 경배이다.
우리는 시편이 보여주는 예배자의 모습에서 신앙고백의 입체적인 표현현상들을 보게 된다. 시편의 예배는 노래함(찬양함)으로 그 기쁨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치며 환호한다. 이는 기쁨이 넘치는 환영의 표현이다. 시를 읊으며 주를 향한 감격을 표출한다. 하나님을 향한 문학적이고 수사적인 표현들은 예배자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 모든 표현은 감동을 넘어 아름답다. 음악적 소양이 있는 사람은 수금과 비파로 수려한 선율을 연주하기도 한다. 리듬에 흥을 돋우는 재주꾼은 소고로 장단을 맞춘다. 모든 백성들이 각자의 재주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공동체의 조화로움을 드러낸다. 이 조화는 오직 하나님께 초점 맞춰질 때 가능하다.
또한 이런 예배는 참여자들의 기능과 재능과 소양을 총동원하여 드려진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이다. 특별히 민족 명절과 일정한 날(당시엔 초하루와 보름)에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민족 정체성을 확인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여 이스라엘의 공동체성 유지에 큰 유익이 되었다. 현재에도 유대인 종교 공동체는 정해진 시기(시간성)에 절기 행사를 갖는다. 여기에는 고대의 유대종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필자는 이스라엘 유학 시절, 통곡의 벽에서 절기 행사를 치루는 유대 종교인들을 목격하곤 했다. 그들의 모습은 매우 공동체적이었다. 그렇다고 집단적인 틀에 억매이지 않았다. 그들 각자는 오로지 개인으로 하나님을 만나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함께 절기 예배의 현장(공간성)에 나왔지만 그들은 각기 개인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함께 예배 드렸지만 단 한 사람도 예배의 중심적인 위치에 서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 외에 따로 주인공은 없었다.
이스라엘은 본디 예배하는 민족이다. 그들은 민족의 최우선적 의무가 예배라고 믿어왔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선민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라는 원칙을 버린 적이 없었다.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4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 왕조시대에 유대 종교는 성전 중심으로 치우치면서 종교 권력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중간기에는 민중을 등에 업은 또 다른 종교 세력이 나타나 세력 간의 갈등 양상으로 치달았다. 그런 종교 분위기에서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신앙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왜곡된 종교 행태만 남게 되었다. 적어도 예수님 당시까지는 그랬다.
이스라엘 패망으로 모든 유대 권력들이 사라지고 온 백성이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되어 흩어지게 되자, 유대 사회는 어떤 정치적 종교적 권력도 상존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교는 회당을 중심으로 일신되면서 수평적이고 토라중심적인 회당 예배를 만들어 왔다.
다시 말해, 권력 부재의 현실 속에서 유대교는 뜻밖에도 본질을 추구하는 계기를 맞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현명한 랍비들은 종교권력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역사로부터 배워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유대교가 세속 권력에 가까워질수록 종교 권력이 출현하기 쉽고, 이렇게 되면 신앙의 본질이 훼손될 위험성이 높아져 예배의 초점이 인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예배의 본연을 담아내는 시편의 원리는 히브리 유대 신앙에만 있었던 것인가? 아니다. 회당예배와는 연속적 관계, 불연속적 관계를 동시에 맺고 있었던 주후 1세기 기독교 초기 예배에서도 목격된다. 박해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외진 곳, 초라한 여건에서조차 함께 모여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소중함을 구현하였다. 그런 조건이 오히려 그들의 예배를 더욱 순전하고 진실한 신앙고백 행위에 집중하게 도왔다. 그 예배에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함이 있었다(엡5:19)." 그 예배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였다.
예배 가운데서 그들은 성령의 교통하심을 체험하였고 하나님과 성도들 간의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경험하였다. 이런 영적 예배 경험을 지속하기 위해 그들은 한 공간에 모이기를 더욱 힘썼고(히10:25) 성도 간에 함께 떡을 떼는 나눔을 실천하였다. 초기 교회의 이런 모습에서 시편의 예배 현상과의 일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동일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현장 예배의 모습이 일맥상통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예배는 로마서(12장 1-2절)의 가르침대로 일차적으로는 개인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개인적 차원의 속성을 갖는다. 아울러 예배는 시간과 공간이 빚어내는 현장성을 전제로 공동체가 만들어 내는 신앙적 표현이라는 면에서 공동체적 차원의 속성을 지닌다.
최근 코로나 사태를 맞아 교계에서는 예배의 본질과 형식을 놓고 양편으로 나뉘어 상대편을 비난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다. 한쪽에서는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한 비대면 예배가 성전 중심의 형식화된 예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의 예배를 회복할 개혁적 전환점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현장 대면예배를 잃는 것은 곧 공예배를 잃는 것이니 신사참배에 맞서 싸웠던 선조들의 순교적 신앙을 본받아 현장 대면예배를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자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간의 교회건물 중심, 목회자 중심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사태를 예배 본질 문제로 전치(轉置, transpose)시킨 것이다. 후자를 주장하는 이들은 기존의 공예배 형식 준수를 순교적 신앙자세와 동일시한다. 이것은 현장 대면예배의 유효성 문제를 거룩한 신앙유산의 문제로 비약시킨 것이다.
양쪽의 신앙 충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정작 성경이 교훈하는 예배의 풍성한 함의(含意) 중에서 한쪽만 강조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다.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포괄적인 안목을 권하고 싶다. 아울러 형제를 향한 활쏘기가 아니라, 놓치고 있던 것들을 서로에게서 배우는 선의(善意)의 기회로 승화시켰으면 좋겠다.
영적 예배의 본질과 현장 예배의 유익, 양쪽 모두를 담아내는 공예배의 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시대정황에 적용 가능하면서도 본질을 살려내는 예배 신학의 정립을 위한 교계와 학계의 통합적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된다.
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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