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그동안 조직신학의 구원론 분야에 속한 중요한 주제들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특별히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믿음, 중생 (거듭남), 칭의, 성화, 견인 등의 주제를 다뤄왔다. 오늘은 구원 서정의 마지막 단계인 영화 (glorification)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영화란 '영광스럽게 변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고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구원과정의 최종단계이다.
영화와 관련해서 대표적인 구절은 로마서 8장 29-30절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특별히 30절에서 예정 - 부르심 - 칭의 - 영화는 구원의 서정에 대해서 하나의 규범을 제시하는 구절이다.
사도 바울만 영화에 대해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도 영화에 대해서 증거한 바 있다. 요한일서 3장 1-2절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한다. 요한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주님의 모습과 같게 될 것 즉 부활하여 영화롭게 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두 가지 범주로 나눠진다. 하나는 영혼의 영화 (spiritual glorification)이고 또 하나는 육신의 영화 (physical glorification)이다. 영혼의 영화는 우리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일어난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순간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며, 우리의 영혼은 죄의 현존으로부터 해방되고 영화되어 낙원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복락을 누리면서 우리 육체의 부활을 기다린다. 즉 우리 영혼이 먼저 영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영혼이 영화될 때 우리의 영혼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완전을 옷입게 된다. 우리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게 되며, 완전히 성숙한 상태가 되며, 영혼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상태로 변화된다. 즉 우리의 영혼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최종 단계까지 나아가게 된다.
우리 영혼이 영화된 다음 우리는 낙원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낙원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최고의 행복을 누리며 산다. 그러면서도 우리 육체의 부활을 기다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낙원에서 지내는 기간은 중간 상태 (intermediate state)이자, 임시 상태 (interim state)이지 최종상태는 아니다. 우리 육체의 영화가 아직 기다리고 있다.
우리 육체의 영화는 주님이 재림할 때 일어난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 우리의 썩은 육체는 부활하게 되며,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재결합을 하게 되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완전한 인간, 예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닮은 인간, 완성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부활의 상태에서 즉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온전히 영화된 상태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인가? 첫째로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영화된 상태가 마치 유령과 같은 영적인 상태로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오해다. 우리의 몸이 부활한다는 것은 우리가 물질성 (materiality)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현세에서 경험하는 부패와 늙어짐이 있는, 죄로 오염된 육체가 아니라, 완전한 육체, 하늘에 속한 영원한 육체를 옷입게 된다. 이 하늘에 속한 육체, 영원한 육체는 결코 썩거나 부패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완전한 육체로 존재한다. 고전 15:42-44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둘째, 영원하고 하늘에 속한 육체를 입은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미 우리가 이 땅을 떠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지긋지긋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죄와 죄의 오염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늘에 속한 영원한 육체를 입게 되면 우리는 또한 죄와 전혀 무관한 영광의 상태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셋째, 영원하고 하늘에 속한 육체를 입은 우리는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된다. 영화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영원화 (eternalization) 된다는 것이다. 영원화된 존재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부활하신 주님이 40일간 이 땅에 계실 때 어떻게 지내셨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다. 한 곳에 게시다가 갑자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셨다. 예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다. 방문을 열지 않고도 그 방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다.
넷째,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음식을 드셨다는 것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만질 수 있었다는 것이며, 예수님이 제자들과 대화를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부활하기 전에 누렸던 일상의 삶 즉 식사와 터치와 대화가 부활한 이후에 그대로 연속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영화되어 영원한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더라도 식사와 서로에 대한 터치와 서로간의 대화가 이어진다는 것은 영광의 상태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삶이 비현실적인 유령과 같은 삶이 아니라 더욱더 현실적이고 더욱더 구체적인 실재적 삶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섯째, 우리가 부활을 거쳐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그 곳에서 영원히 충만하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그 삶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2장 3-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섬김은 단순한 봉사를 넘어 예배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삶 즉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통과 사귐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통치자로서의 삶 즉 매우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경험하게 될 내세의 상태가 어떠할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내세에서 어떤 삶을 누리게 될 것인 가를 기억할 때 우리는 내세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고, 내세를 간절히 고대하고, 내세에 대하여 지체들과 함께 행복한 대화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를 세 가지로 정리하면서 그 중 하나가 바로 "내세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는 삶"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경험하게 될 영화의 상태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내세에서의 삶을 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현세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게 되고, 현세를 더 힘있고 성숙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성욱 교수(덴버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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