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495주년을 맞는다. 2006년 6월호 타임지(Time 誌)는 인류역사에서 100대 사건을 소개했다. 그 중에 ‘종교개혁’이 최상위에 포함되었다. 그만큼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상당한 분야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즉, 근대시민사회의 발현, 개인 양심에 대한 권리, 직업과 윤리, 정교의 분리, 성경의 대중적 보급, 평신도의 제사장적 위상 확립 등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는 한마디로 당시의 ‘종교 타락’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신앙양심의 회복’과 ‘성경가치의 재발견’을 의미한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와 ‘성물 판매’를 통해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사기극(詐欺劇)을 벌였고, 엄격한 심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중재자인 것처럼 마리아 숭배도 강요하였다.
또 보속교리(補贖敎理)로 행위구원을 강조하였고, 성경은 라틴어로만 읽혀져 성직자들만이 성경해석의 권리를 가졌으며, 교황의 교리 선포가 ‘절대무오’하다는 종교적 전횡을 일삼았다. 거기에다 성직자들이 독신을 주장하면서 성(性)적 타락까지 일삼는, 다양한 복음적 가치 하락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의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이에 강한 회의감을 갖고 비텐베르크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재하므로 비로소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것이다. 그는 신약성경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강한 영적인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의 모토(Motto)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다. 그렇다면 제2의 종교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한국교회는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첫째는 고감도의 영적 자각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이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도다운 삶을 회복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서’ 그 행위의 방향을 정해야 한다. 그런데 효험만 있으면 이를 따르는 종교행위는 결국 교회 타락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위기의 양상은 물질주의의 문제, 교회 조직 건강성의 문제, 지도자들의 경건한 삶의 문제 등이다.
둘째는 사회적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숫자적으로는 전 국민의 2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사회적 선한 영향력의 체감도는 얼마나 될까? 교회회원(Membership)이 많은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Discipleship)를 가진 참 성도가 많은 것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회원은 교회 안에서만 중요한 것일 뿐이며, 제자는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 복음적 가치를 실현하므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주변 사람들의 가난과 아픔을 등한히 하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셋째로 복음의 순수성과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명으로 주신, 사랑의 계명을 힘써 준행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20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법철학자요, 평신도 신학자였던 쟈크 엘룰(Jacques Ellul)은 ‘교회는 진정 성자들의 호텔이 아니라, 병자들의 병원이어야만 한다’고 하였다. 마르틴 루터도 ‘너희 이웃은 헐벗은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애통해하는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아내와 자녀들이 함께 수치를 당하고 있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향해 너의 도움의 손길을 펼쳐라. 지금 여기에서 너희 일을 시작하라’고 하였다.
종교개혁 495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 이제 깨어 일어나야 한다. 성경적 권위와 믿음의 가치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올려 드리는 복음의 능력을 새롭게 회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