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그토록 강조하는 하나님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나라임을 본다. 가난한 자, 억눌린 자의 해방을 강조하며 늘 약자 편에 섰던 예수님의 사역은 천국이 어떤 곳인가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준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 땅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랬었는지 복음서를 통해 본다. 이 땅과 저 천국에서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아니 실현되어야 하는 나라 바로 ‘공평과 정의’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가?
그런데 성서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공평과 정의와는 다소 거리가 먼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나온다. 마태복음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좋은 땅의 비유를 말씀 하신 후 천국의 비밀이 제자들에게는 알게 허락되었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있는 자가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가 그 있는 것도 빼앗기다니! 적어도 예수님의 공평과 정의라고 한다면 있는 자의 것을 빼앗아 없는 자에게 주고, 없는 자는 더 받도록 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본문은 그 반대의 말씀을 하신다. 바로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있는 자가 더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더 가난하게 흘러간다. 인간의 성본능을 중심으로 한 욕망의 문제를 핵심으로 다룬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고전적 정신분석학 이후 등장한 신(新) 정신분석학이라고 불리는 대상관계이론에서는 주 양육자인 엄마와 아이의 정서적 관계를 중시한다. 젖먹이 때부터 주 양육자와 강렬한 정서적 관계를 맺게 되어 있는 아이는 생후 처음 만나는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배우게 된다고 한다. 즉, 엄마가 젖을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아이의 필요와 욕구를 민감하게 충족시켜주면 아이는 ‘나는 이 세상에 잘 태어났구나’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야’하는 만족감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의 긍정적인 경험들은 무의식에 저장되어 좋은 내적 대상(good inner objects), 다시 말하면 자신과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일단 이러한 좋은 내적 대상경험이 쌓이면 아이는 그 후 세상과의 경험에서도 이 내면에 있던 긍정경험들이 다시 재현되어 타인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맺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하고 그러한 행동이 긍정적인 반응을 유도하며 결국 그 아이는 ‘역시 세상에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충분해’라는 건강한 자존감을 경험하는 일종의 선순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긍정적이 대인관계를 맺고 자존감이 높은 건강한 개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태어나자마자 유기, 방임, 학대와 같은 부정적인 경험을 더 많이 경험한 아이는 내면에 부정적인 내적 대상(bad inner objects)이 형성된다. 즉, 자신과 타인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부정적인 경험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긍정적인 경험을 해 줄 때 그것을 건강하게 받아 누리기가 어려워진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일단 부정적인 경험이 형성되면 후에 누군가가 잘 대해주는 긍정적인 경험이 일어나도 그 경험을 잘 받아 간직하기가 어렵다.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 밀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에게 잘해주려고 의도했던 그 상대는 무력해지고 더 사랑의 관계를 맺기 부담스러워지고 그 상대 역시 그 아이를 밀어내게 될 것이다. 이 때 아이는 ‘그렇지, 결국 이런 거지, 내가 무슨 사랑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다시 확인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관계의 악순환(惡循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면서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진정 경건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끊임없이 기대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양들을 보살피며 살리는 사역을 할 때마다 그 결과에 감탄하기 보다는 시기심에 요동을 쳤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보면 부정적인 내적 대상이 압도된 마음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선한 예수님의 사역을 받아들일 마음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복음서에서 어린아이의 마음이었던 이방인, 병든 자들이 예수님의 치유를 순수하게 기대하고 경험함으로 복음의 증인이 되어가는 예들도 본다. 그야말로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성서의 이야기까지 갈 것 없이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내 마음은 지금 하나님을 향해, 인간관계를 향해, 내 자신의 인생을 향해 긍정적인 방향의 선순환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내 인생에, 이 사회에 일어나는 일 들 속에서 하나님의 희망을 보며 기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마음은 부정적인 경험이 더 압도되어 부정적인 방향의 악순환을 기대하고 있는가? 그래서 설령 좋은 경험이 내게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지 못하고 냉소적이며 비판적으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내 인생은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얼마나 손해인가?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은 우리 안에 이 좋은 내적 대상이 축적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말씀을 통해 마음의 내비게이션을 복음과 구원, 따뜻함과 사랑을 향해 다시 재조정하고, 주변의 좋은 관계를 맺으며 인간에 대한 오해를 풀고, 이 과정 속에서 무엇보다 내 인생을 향한 긍정적인 기대를 더 하며 조금씩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있는 자가 받아 넉넉하게 되는 신앙의 비밀인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오해를 풀고 하나님 중심으로 자신과 세상을 다시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심리 상담이 상담자와의 긍정경험을 통해 그동안 경험했던 자신과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오해를 수정하는 교정적인 정서경험(corrective emotional experience)을 제공하는 것처럼, 교회 또한 하나님 중심으로, 복음 중심으로 삶에 대한 관점이 교정되는 경험이 제공되는 곳이며 제공되어야 한다.
일단 나부터 이 선순환을 시작하자. 첫 시작이 어렵지 일단 그 선함이 시작되면 선순환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선을 행하는데 두려워하지 말자. 일단 시동을 걸고 네비게이션을 틀고 핸들을 잡고 운전을 시작하는 것처럼, 다소 의지적이라고 하더라도 말씀에 초점을 두고 기대를 해보기로 하는 것이다. 일단 시동이 걸리면 차가 출발하고 그 다음 조금 수월하듯이, 내 마음도 그렇다.
2020년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이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가 시작된다. 어느 해보다 냉소적이고 피곤하고 지치는 한 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전부가 아니다. 감사제목을 찾다보면 더 감사제목이 많아지고, 주님의 탄생도 기대하면 더 기대감이 커진다. 우리의 마음이, 가정이, 교회가 더욱더 선순환이 활발해 지기를.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는 복음의 비밀이 경험되기를 맘껏 기대해보자.
이경애 박사(이화여자대학교 박사(Ph.D), 이화여대 외래교수, 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