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누가 도덕률을 만드는가?”이다. 신인가, 아니면 신의 자리를 차지한 인간인가? 유신론에서는 신이, 인본주의에서는 인간이 만든다고 할 것이다. 유신론과 인본주의의 가장 큰 차이는 도덕률의 근원을 어디에 의존하느냐이다.
인본주의자는 기독교가 제시하는 절대적 도덕률을 거부한다. 초자연적 존재가 제시하는 십계명과 같은 도덕률은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너무 억압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1933년, 1973년 그리고 2003년 세 번에 걸쳐 발표된 ‘인본주의자 선언-I, II & III’을 통해 그들은 인본주의가 윤리적임을 주장하였다. 절대적인 도덕률의 기반이 없는 도덕성이 과연 가능할까? 인본주의자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본주의자의 윤리’라는 책에서 그들은 절대자 없이 보편적 도덕성을 정의하려 할 때 겪는 어려움을 보여 주고 있다. “개인의 이익이 선악의 기준인가 혹은 다수의 이익이 그 기준인가? 선과 악은 마음의 표현인가 머리의 표현인가? 도덕성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이 행위의 의도인가 결과인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인본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도덕률에서 ‘꼭 지켜야 하는 것’이 있을 때에는 왜 꼭 지켜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반드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신이 없다고 믿는 그들은 절대적 도덕률의 근원을 제시할 수 없기에 상대주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인본주의자들은 상대적 도덕률 아래서 선악을 판단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이성은 진화의 과정 속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간에게만 생겨난 것이며, 인간이 지속적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윤리적으로도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 원리인 진화론과 윤리를 결합해야만 하는 난관에 봉착한다. 심지어 “투쟁이나 전쟁은 생물학적 필요이며 더 나은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라는 진화론적 결론이 윤리와 결합해야만 할 상황이 되면 이성이 도덕률의 근원이라는 가정은 힘을 잃고 만다.
이처럼 기댈 근원을 상실한 상대주의 윤리는 주어진 상황마다 그 기준을 논의, 검토, 선택해야 하는 상황윤리로 흘러가게 된다. 심지어 폴 커츠는 “도덕적 원칙들은 실용적 가치를 실험해 보고, 그 결과에 의해 선택할지 말지를 판단할 가설로 취급해야 한다.”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개인의 무제한적인 행복추구의 욕구는 어떤 도덕률의 제약이나 법적인 처벌 없이는 효과적으로 제어될 수 없다. 따라서 도덕적 상대주의 때문에 생긴 윤리적 공백은 힘을 가진 개인의 감정적 충동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뉴에이지는 모든 것에 신성이 있고 나에게도 신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가 신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세속적 인본주의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듯방법은 다르지만 인간이 신의 자리에 앉는 것은 동일하다. 그래서 뉴에이지를 우주적 인본주의(cosmic humanism)라고도 한다. 이들은 브라만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윤리적 제한요소도 불필요한 제약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평가 혹은 판단하는 일체의 행위를 멈추고 모든 다른 관점들을 포용하라고 가르친다.
“네가 옳다고 느끼는 것을 따라 너의 현실을 창조하라.”가 뉴에이지 신조이다. 스스로 동성애자, 양성애자, 일부일처제,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혹은 다른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것이 나에게는 옳다고 생각하면 어떤 선택이든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설립한 상대적 윤리이며 자율적으로 자기 윤리를 디자인해 간다. 이 같은 개인의 자율성은 모든 면에서 상대주의를 추구하는 뉴에이지에서 주장하는 절대적인 권고이다.
이 자율성은 가치 판단의 권위를 자기 자신에게 둔다. 개인이 자율권을 획득할 때 그들의 내적 가치는 상승하고 그렇게 된 개인은 더 고등한 의식을 탐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외부에서 자율권에 대한 제한이 가해지면 내면의 진실과 접촉하는 개인의 능력이 방해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성적으로 개인을 제한하는 전통적 성윤리도 완전히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지에는 절대적인 선악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 개인이 자율적으로 정한 선악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선과 악이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데이빗 스팽글러는 “그리스도는 루시퍼와 같은 세력이다. 루시퍼는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인간을 준비시킨다.”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모든 것이 하나라면 선악의 기준은 사라져 버린다.
기독교인은 인본주의자들의 도덕적 상대주의의 문제점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윤리의 궁극적인 원천이시고, 우리가 그 자리를 취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기독교인에게 도덕적 거룩함의 추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다. 기독교인은 도덕적 상대주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절대적 도덕률을 무시하고 상대주의를 택하는 것은 도덕이란 이름 아래에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려는 핑계에 불과하다. 욥처럼 절대적 도덕률이신 하나님을 직면할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선함에 대한 주장을 내려놓으며, 자기정당화를 포기하고, 스스로가 죄인임을 철저히 인정하며, 티끌과 재 가운데서 겸손하게 회개하게 된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묵상: 나의 삶에서 도덕적 상대주의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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