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오전 10시에 진행되는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 24일 모임에선 탈북민 지영애 전도사(연세중앙교회)가 북한에서의 삶을 간증했다.
지영애 전도사는 “함경북도 샛별군에서 평범한 농부의 가정에 둘째 딸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정부의 방침으로 농업 부분에서 일하다가 1992년 결혼해서 예쁜 딸을 낳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이 죽고 북한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고, 행복했던 우리 가정도 헤어지게 되었다. 2004년 5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서 딸아이의 손을 꼭 잡고 일주일만 있다가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영영 가슴 아픈 이별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이어 “탈북해서 중국 왕청에서 딸을 낳고 3년을 살았다. 그런데 2007년 10월 한 청년이 돈을 받고 공안에 신고해서 같이 살던 북한 여자 10명이 모두 다 체포되었다. 그래도 북한으로 잡혀가면 가족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소망이 있었는데, 사랑하는 가족이 아닌 커다란 몽둥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담당 보위부의 심문이 들어갔다. 첫 질문이 3년 동안 중국에서 하나님을 믿었냐는 것이었다. 하나님도 못 들어보고 십자가도 못 봤다고 하니 거짓말이라며 3일 동안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해 온몸이 피투성이에 멍이 들었다. 온몸이 부어 맞아도 아프지 않아서 가만있으니 내의와 양말만 신긴 채 눈밭에 내놓았다. 매 맞는 것보다 힘든 고통이었다. 내가 계속 같은 말을 하니까 석달을 구류하다가 교화소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지 전도사는 “당시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교화소로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전원들이 족쇄를 채워 병원에 데려가 강제로 낙태 주사를 놓았다. 낙태하고 3일 만에 전거리교화소로 보내졌고, 3년 형을 받았다. 악명높은 교화소를 들어가보니 콧구멍만한 크기의 방에 60~80명이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머리를 삭발하고, 옷을 다 뜯어 짝짝이로 만들고, 가슴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대신 번호를 달고 교화소 생활을 했다. 교화소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할 순 없지만 자다가도 생각나면 소스라치며 놀라서 깰 정도로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며 울먹였다.
이어 “그곳에서 살면서 42도까지 열이 오르는 열병에 걸렸다. 고열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허약해졌다. 썩은 양배춧국과 밥덩이를 약으로 바꿔서 먹었지만 열이 오르고 체중이 27kg까지 빠져서 걷지도 못하고 기어 다녔다. 허약자들만 있는 감방에 누워 하늘을 보며, 저 높은 하늘에 신이 있다고 하는데 신이 있다면 나를 제발 좀 살려달라고 했다. 교화소에서 죽으면 나처럼 빼빼 마른 사람은 몸을 꺾은 뒤 수레에 실어 불망산에서 태워버리고, 굵은 뼈는 바깥에 던져버리기 때문이었다. 저곳에서 죽는 사람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 신세가 되니 처음으로 나를 낳은 부모님을 원망했다”고 했다.
이어 “그런 나를 보고 살고 싶냐고 누군가가 물었다. 나는 여기서 죽으면 개보다도 못한 죽음인데 죽어도 고향에 내려가서 죽겠다고 무조건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나를 사체실 앞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나 같은 허약자들 열 명이 앉아 사체실에서 나오는 구더기를 주워 먹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많이 주워먹어서 부족했다. 나는 죽어도 구더기는 못 먹겠다고 다시 기어서 방으로 돌아왔다. 교화소에선 하루에 열 명씩 죽어나가니까 두려워서 제발 나를 좀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울었다. 담당 보안원이 와서 일주일 뒤 만기니까 이제부터 걷기 연습을 하라고 막대기를 주었다. 힘이 없어 그마저도 못하니까 교화소 식당에 데려가 먹고 싶은대로 먹으라고 했지만, 허약하니 먹은 즉시 다 배설했다”고 했다.
그는 “교화소를 나가려면 보호자가 있어야 했는데, 데리러 올 가족이 없었다. 제발 누구라도 나를 데리러 와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다음날 마침 군 안전부에서 죄인을 호송하기 위해 온 경찰 두 명이 나를 데려갔다. 내가 걷지 못하니 빨리 걸으라고 자꾸 발로 찼다. 기어서든 어떻게든 알아서 가겠다고 하니 걷지도 못하는 내가 도망칠 거로 생각했는지 나를 둘러업고 해령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고향에 내려가니 집은 없어지고, 작은 몸뚱이 둘 곳도 없어 사돈집에 찾아갔다. 시체와도 같은 날 보고 곧 죽을 거라 생각해서 장례 준비를 해놓고 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 다섯 명이 내 머리맡에 앉아 숨이 넘어가기를 기다렸는데 죽지 않고 살아났다”고 했다.
이어 “그곳에서 나를 더는 거둘 수가 없었기에 엄마를 찾아갔다. 엄마를 만난 기쁨보다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은 엄마를 원망했다. 엄마는 내가 감옥에 있는지도 몰랐다며 손을 잡고 우셨다. 엄마와 헤어지며 죽어도 다시는 중국에 안 가겠다고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작은 몸뚱이 하나를 둘 곳이 없어 회복되지 않은 몸을 끌고 다섯 달만에 중국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소금을 뿌리고 침을 뱉으며 가슴 아픈 상처를 남긴 내 고향 북한 땅을 다시는 안 밟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지 전도사는 “중국에서 남편과 딸을 만나 다시 3년을 살던 중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언니가 한국으로 오라고 연락을 했다. 교회를 통해 오기에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에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하나님이 있으면 우리를 이렇게 살게 하냐고 성경공부를 안 하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2015년에 단속이 심해져서 잡혀갈까봐 성경공부도 하고 한국에 가겠다고 했다. 동남아에 있는 교회였는데, 목사님께서 주시는 성경책을 보는 순간 안 믿는다고 던져버리고, 그렇게 북한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왔는데도 주체사상을 믿겠다고 말했다. 기도할 때도 우습고 성경통독도 안 하고, 하나님을 욕하며, 성경공부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지었다”고 했다.
이어 “한 달 있다가 목사님이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여주셨다. 감옥에서 살다 나오니까 눈물도 없고, 누가 나를 손으로 치면 물어뜯어 죽일 기세였는데, 영화를 보니까 눈물이 절로 났다. 그때까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는데, 영화를 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다음부터 울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드렸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찬양을 듣는데, 나 같은 사람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니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선 이 심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목사님께서 이 찬양은 성경에 나오는 건데 하나님께서 자매님을 너무 사랑하신다며, 자매님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자매님의 죄를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라고 하셨다. 그 말에 북한에선 부모도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했던 내 죄를 하나님이 누구신데 내 죄를 대신해서 아들을 죽였냐고 기도했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은 내가 너를 그 땅에서 인도해냈다고 하셨다(출 20:2). 이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로 끌어냈다면, 나는 북한에서 태어난 것도 후회하고 아버지 엄마 딸로 태어난 것도 원망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네가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땅으로 인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응답을 주셨다. 그때 생각나는 게 교화소에선 그 전날까지 멀쩡하던 사람도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죽어있었다. 그런데 나는 구석에서 빌빌거리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를 거기서 살려주셨다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 전도사는 “원래는 돈을 벌어서 국적을 따고 다시 중국에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 나이에 내가 돈을 벌어서 가져가면 얼마나 가져가겠냐고,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신학대학에 가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2016년 10월 하나원을 졸업하고 신앙하던 언니를 따라 연세중앙교회를 다녔다. 고작 성경 공부 석 달, 신앙생활 두 달을 하고 신학대학을 가겠다고 하니 1,2년은 정착을 하고 가라며 언니도 목사님도 말렸다. 그때 기도하니 네가 이제 세상에 물들면 공부를 안 한다고 나만 믿고 가라고 하셔서 신학대를 지원하게 됐다”고 했다.
이어 “서울신학대 면접을 하러 가서 학과장님과 대화를 했는데, 나이도 40이 넘었고, 대학 첫 등록비가 430만 원인데 그 비싼 등록비까지 내면서 공부하는 이유를 물었다. 제가 그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흘리신 핏값에 비하면 430만 원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더니 합격시켜 주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보니 욕망, 오기만으로는 다닐 수 없었다. 신학교는 성경공부만 하는 줄 알았는데, 정치, 경제, 글로벌, 다문화, 언어 등 처음 듣는 것들이어서 내 힘으론 못하겠다고 포기하려고 했다. 그때 마침 신학교 수련회가 있어 참가했는데, 은혜를 받아 주님 앞에 서원했던 것을 불순종하려 했다고 앞으로 순종하겠다고 눈물로 기도했다. 하지만 중국에 와서 수술만 5번을 받아서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신앙생활도 힘들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했는데 컴퓨터를 배우지 못해서 힘이 들었다. 울면서 너무 힘들다고 기도하니 주님께서 네가 전거리교화소에서 있었던 일을 벌써 잊었냐는 감동을 주셨다. 주님께 잠시나마 행복에 도취해서 교화소 일을 잊었다고, 그곳의 일을 잊지 않고 끝까지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일으켜 달라고 기도했다”고 했다.
지 전도사는 “여기서 이렇게 사는 거 보면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북한 사람들 이 땅에서 북한 고위 간부 못지않은 생활을 하고 있고, 저는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데 전거리교화소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고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간증하면 항상 ‘나는 27kg이 되어서 나왔지만 내 목숨은 우리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불러주시고, 고향에선 죽을 때까지 호미를 들고 농사일만 했을 자인데 이 땅에 와서 큰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으니 감사하다. 북한에 있는 딸은 헤어진 지 16년이 되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셔서 전화 통화만 한 번 했다. 중국에서 잡히면 고향에라도 갈 수 있지만 대한민국에 왔기 때문에 복음으로 통일이 안 되면 고향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도 볼 수 없다. 그래서 하루빨리 복음통일을 일으켜서 고향 땅에 돈이 아니라 성경책을 들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 계신 북한 동포들, 대한민국 성도들이 우리 고향 북한을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해주시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