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①금년(2012)은 종교개혁 495주년을 맞는다. 마틴 루터가 윗템베르그 교회당 게시판에 ‘95개조 토론주제’를 게시한 날(1517년 10월31일)을 종교개혁의 날로 삼는다.
② 종교개혁 사건은 그리스도교 교회사 안에서 발생한 종교적 사건으로서만 아니라, 유럽문명의 사회, 경제,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준 세계 문화사적 사건이 된다. 예들면, 근대시민사회의 출현과 함께 개인양심의 자유권, 직업윤리, 국가권력과 교권의 분리, 성경의 대중보급, 평신도 위상, 인문학 연구등에서 특히 큰 영향을 끼쳤다.
③ 흔히 종교개혁운동의 3대 원리로서 “오직 믿음만, 오직 은총만, 오직 성서만”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모토가 말하려는 근본정신을 망각하면 경직된 교리에 갇히는 개신교가 되고 마는 위험이 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개신교교회(改新敎 敎會, Protestant Church)에 속한다고 주장하지만, 진정한 종교개혁자들의 종교개혁정신에서 일탈해 변질되어 있다.
④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작센지역 아이스레벤에서 광산업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에르푸르트대학 인문학부에서 학사,석사과정을 마쳤다. 부모는 루터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랬으나, 1505년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에 수도사로서 들어갔다. 그는 어거스틴수도회 수도사이자(1506년 수사서원), 보좌신부이며(1507년 사제서품), 윗텐베르그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1512)를 받고 동대학에서 가르치는 신학교수였다. 수도회의 일원으로 베드로 성당이 있는 로마시를 방문하고서 교회청 고등 성직자들의 경박함과 속화된 모습을 보고 맘에 큰 충격을 받았다.
⑤ 루터의 ‘95개조 논제’ 게시의 목적은 로마가톨릭교회를 탈퇴하거나 ‘하나의 교회’로부터 분렬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다만, 당시 로마교회 교황 레오10세(Leo X, 1513-1521)의 칙령으로서 ‘성베드로성당 건축’ 완공을 명분으로하여 모금하는 ‘면죄부’의 판매가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가? 성서적이고 신앙에 옳은 일인가를 진지하게 한번 토론하자는 ‘95개조 논제’ 제안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동기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수도회가 정한 계율을 다 지킨다고 장담할 수 없었고, 그러한 자신의 계명준수의 명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주장 할수 없음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개인의 사후 책벌과 심지어 가족친지들의 죄까지도 용서되어 심판의 연옥에서 구출된다고 말하는 ‘면죄부’ 판매 행위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것은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모습이고 오늘의 가톨릭 교회모습이 아님을 유념할 것]
⑥ 복음적인 올바른 신앙과 참된 경건과 깨끗한 신앙양심을 살리려는 마틴 루터의 문제제기는 당시 교황청 당국에 분노를 사게 되었다. 교황은 공적으로 루터를 파문한다는 공식적 ‘파문교서’를 발표하였다(1521.1월). 당시 신성로마제국 상황은 교황의 종교권과 세속 정치의 황제권이 상호 협력하기도하고 긴장관게에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제국안에서의 여러지방 선제후들 사이에 갈등이 있게 되면서부터 마틴 루터는 신분상 위험을 받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안에서도 큰 세력을 가진 7 선제후가 있었는데, 그 중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마틴 루터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루터의 신변안전을 보호하였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공개적 ‘청문회’없이 루터를 처벌하지 않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제후들, 귀족들, 고급성직자들이 보름스에 모여 ‘보름스 제국회의’를 1521년 4월 17-18일 열게 되었다.
⑦ 루터를 비난하는 책들과 고소장들이 쌓여있는 보름스제국회의 에서 루터는 성서와 이성에 의해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확증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있는 자신의 양심을 거스를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이 나의 입장입니다. 나는 다른 어떤 일도 할수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서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라는 유명한 말로서 마틴 루터는 자기변호를 끝냈다.
공중에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수 있다고 할만한 당시 로마교황청의 절대교권에 맞서서 신성로마제국 변두리 시골 신학교의 무명의 수도사 마틴 루터라는 한 사람이 ‘양심의 소리’와 ‘성경의 복음’에 근거하여 진리의 이름으로 ‘불의와 비진리에 대하여 용감한 항의’를 하였기에 그 이후부터 개신교도에게 ‘항의하는 자들’(protestants)이라는 별칭이 붙여진 것이다. 세상에 비진리와 불의를 보고서도 항의하는 용기를 갖지않고 도리혀 타협하고 아부하는 신자를 개신교도라고 말 할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부흥발전한다는 한국개신교가 진정으로 ‘개신교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깊이 성찰 해볼 일이다.
[2] 종교개혁정신의 본질과 그 사상적 · 신앙적 의미
1)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의 값어치에 대한 ‘성경의 재발견’이며 ‘신앙양심’의 고민의 결과다.
① 중세기 1000년동안 성경은 라틴어로만 읽혀졌고, 성직자들만 읽고 해석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성경은 다른 교황청의 공의회 결정문서들과 차이가 없는 것이 되었고, 교황이 선포하는 교리적 선포가 절대오류가 없는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② 루터는 수도원의 모든 규칙들과 수도규정을 모두 실천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흠잡을 데 없을 만큼 구원조건에 필요충분할만큼 실천했다고누가 보장해주는가? 루터는 수도회규정을 엄격하게 실행하면 할수록, 양심 저 깊은 곳에서는 불완전함과 불안을 느꼈다.
루터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다가 결국 로마서 1:17절에 나오는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하박국 2:4)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말씀에 맞닥드렸다.
③ 여기에서 중요한 말은 ‘하나님의 의’라는 말과 ‘믿음으로 살리라’는 두 말이다.
‘하나님의 의’란 ‘사람의 의로움’과 대비되는 하나님의 자비, 사랑, 신실, 긍휼히 여기심, 거룩하심, 공의로우심등을 의미한다. ‘사람의 의로움’은 인간이 행한 도덕적 선행, 종교계율의 준수, 정통교리 지식, 신비체험등을 모두 내포한다. 루터는 우리 구원의 가능성과 근거가 ‘하나님의 의’ 에 뿌리박은 것이라야 하며 결코 ‘사람의 의로움’으로는 보장 할수 없다는 진실을 복음이 말한다고 개달은 것이다. 왜냐하면 진솔한 ‘신앙인의 양심’이 예민함은 “이만하면 충분하게 되었다 ”는 도덕적 자기기만에 머물수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중 출발점은 ‘양심의 예민한 소리’와 ‘성서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용서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고 용납하시는 은총의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2) ‘믿음으로만’으로만 이라는 모토로서 표현되는 종교개혁정신은 495년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많은 변질과 타락과 곡해가 발생했다.
① 첫째오해: ‘믿음’을 기독교가 말하는 중요한 중심교리를 받아드리고 승인하며 주장하고 선양하는 열심인줄로 오해한다. 예들면 보수적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구원받를 사람의 ‘구원필수조건’으로서 5가지 근본교리를 주장한다: 성경의 문자무오성, 예수의 동정녀탄생, 십자가 대속사실, 예수의 육체부활, 예수의 재림, 이상 5가지를 굳게 믿는 것이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성경의미의 변질이며, 종교개혁정신의 곡해이다.
② 둘째오해: ‘믿음’을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선행’으로 착각한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다든지, 교회개척을 자비량하여 여러곳에 개척했다던지, 사회복지 성금을 많이 희사한 사람들을 주위에서는 “그 사람 믿음이 참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전도와 선교에 열정적인 것이 믿음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폐단에 이르고, 오늘의 한국교회는 또다른 ‘공로신앙’에 빠지고 말았다.
③ 셋째오해: ‘믿음’을 루터가 종교적 회심을 경험하기전에 힘쓰던 일 곧 수도회규정을 엄정하게 잘지키는 일, 적어도 ‘십계명’을 구체적으로 어기지 않고 준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두가지가 발생한다. 첫째, 이런 이해의 ‘믿음’은 ‘평화와 감사와 신뢰감’ 속에서 숨쉬지 않고 항상 ‘불안과 두려움과 신뢰감의 결여 곧 의심’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중세기 1000년동안 일반대중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은총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연옥의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형국이었다. 현대 유럽 여러도시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중세기의 대부분 종교화(宗敎畵)가 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틴 루터는 ‘성서’의 중요성을 재발견함과 동시에 성서의 복음이 전하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3] 결론
루터가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긍휼하심, 공의로우심을 믿는 일이며 질그릇에 불과한 피조물을 소홀하게 대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신 품성에 대한 전적 신뢰와 고백을 의미하였다. 탕자가 회개하고 고향의 아버지께 돌아기만 하면 자비로우신 아버지는 탕자의 죄를 묻지않고 맞아주신다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가 말한 ‘오직 믿음으로만!’ 이라는 모토가 기독교의 신학적 교리를 믿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인격적 전적위탁’(commitment)행위 임을 깨닫는 일은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 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