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구원론 분야는 구원의 필요성, 구원받는 방법, 그리고 구원의 서정 (ordo salutis, order of salvation) 등을 다룬다. 구원의 필요성과 관련해서는 인간본성의 전적타락과 무능력 그리고 인간이 처해있는 비참한 상태와 운명에 대해서 논의한다. 구원을 얻는 방법과 관련해서는 오직 은혜와 믿음의 원리를 다룬다. 구원의 서정은 대체로 예정/선택 (predestination/election), 소명 (calling), 회심 (conversion), 중생 (regeneration), 연합 (union), 칭의 (justification), 양자 (adoption), 성화 (sanctification), 견인 (perseverance), 영화 (glorification) 등의 주제를 순서를 따라 논의한다. 물론 신학자 개인의 입장에 따라 중생이 믿음 앞에 오기도 하고, 칭의가 연합 앞에 오기도 하며, 예정에 대한 관점이 칼빈주의적 (Calvinistic)이거나 알미니안주의적 (Arminian)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구원의 서정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위에서 언급된 것들이다.
구원론 중에서도 견인론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성도들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번 회개하고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은 성도가 중간에 타락하거나 변절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도들은 영원히 안전한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과 관련해서 개혁주의/칼빈주의의 관점은 성도들의 구원은 절대 취소될 수 없으며,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once saved always saved)이라는 것이다. 반면 알미니안주의의 관점은 참된 믿음으로 성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심각하게 타락하거나 변절하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은 특별히 종교개혁 이후 지난 400여 년 동안 신학자들 간에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개혁주의와 칼빈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필자는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중간에 결코 구원에서 탈락하거나,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라고 믿는다. 이런 관점과 관련해서 중요한 성경구절들 중에는 빌립보서 1장 6절이 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여기서 착한 일이란 당연히 구원의 역사이다.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 즉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이루실 줄 즉 온전히 완성하실 줄을 확신한다는 바울의 고백이다. 이런 구절을 읽고도 성도의 구원이 중간에 상실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것은 주님의 권능을 만홀히 여기는 어리석은 생각일 수 밖에 없다.
빌리보서 1장 6절보다 더 중요한 구절은 로마서 8장에 나온다. 로마서 8장 26절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성령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내용은 로마서 8장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우리의 성화와 견인이다. 성령은 당신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 성도의 믿음이 날마다 성숙하게 되기를 성부께 기도하신다. 그리고 성화의 과정 중에서 우리가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여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마서 8장은 성령만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자 예수님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말씀한다. 로마서 8장 34절은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또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의 맥락을 고려할 때 예수님의 기도 역시 우리의 성화와 견인을 위한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결국 우리의 성화와 견인 즉 성도가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변화될 뿐 아니라, 끝까지 견디고 인내할 수 있도록 삼위일체의 제 2위격이신 성자와 제 3위격이신 성령이 기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어야 한다. 성자가 성부께 기도하시고, 성령이 성부께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시는데 그 기도가 응답이 안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고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심각한 내부모순과 내부균열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영원히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계신다. 또한 각각의 세 위격이 의지적 기능 (volitional function)을 갖고 계시지만, 여전히 세 위격은 항상 동일한 한 뜻 (one will)으로 행하신다. 그러므로 성자와 성령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어야 하며, 그 응답의 결과는 성도들의 성화와 견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부 성도의 견인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히브리서 6장 4-6절을 근거 구절로 내세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구절은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큰 원리 즉 성도가 중간에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는 원리에 입각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타락한 자들은 참되게 믿었다가 타락한 자들이 아니라, 참된 믿음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어떤 영적 감동이나 기쁨을 느낀 자들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사람들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밭에 뿌려진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또 이와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막 4:16-17). 즉 말씀을 기쁨으로 즉시 받으나, 참된 믿음의 뿌리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을 때에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칭의함을 받는다. 이 때 우리의 구원은 확정된다. 물론 이 확정의 시점이 완성의 시점은 아니다. 우리 구원의 완성은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낙원으로 갈 때 영혼의 영화를 경험함으로, 그리고 주님 재림시 육신의 부활을 경험함으로 이뤄진다. 분명한 것은 참된 믿음으로 구원이 확정된 성도는 영원히 안전 (eternal security)하다. 그는 중간에 결코 구원에서 탈락하거나,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 물론 이 진리가 그들의 영적 태만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구원이 영원히 확정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가야하는 거룩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빌립보서 2장 12절 말씀을 오해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경의 원문을 정확하게 해석한다면 여기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회심과 칭의의 사건에서 구원이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성화과정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도리어 이 말씀은 회심과 칭의의 사건에서 구원이 확정된 성도들은 그 구원의 생명력을 발휘하면서 (work out) 살아가라 즉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한번 확정하신 구원은 결코 폐기되거나 상실될 수 없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혹시 어떤 신자가 수십 년의 신앙생활을 하고서도 끝내 믿음을 저버리고 이 땅을 떠났다면 그는 처음부터 참된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견인을 위해서 성자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님이 기도하신다. 이것보다 더 큰 보증은 없다. 사랑하는 지체들이 이 점에 대해서 결코 혼란이나 오해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성욱 교수(덴버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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