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가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이처럼 자유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가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감옥에 가두어 사회와 격리시키고 자유를 제한합니다. 독방에 갇힌 사람은 외로움에 더욱 고통스러워합니다. 때로는 힘의 논리에 의해 자유를 제한받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의인은 고통을 당하고 백성은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의인이 권력을 잡으면 악인이 심판을 받고 백성이 행복해집니다.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잠28:28)
야곱의 아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중심으로 살다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에도 넘어가지 않고 믿음을 지켰지만 바울처럼 억울하게 감옥에 갔습니다.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창39:19~20)
때로는 의인이 악인처럼, 악인이 의인처럼 대우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라도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심판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악인이 기세등등해도 그들의 마지막은 아침안개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악인의 등불은 꺼지고 맙니다. “대저 행악자는 미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24:20)
1. 복음전파에 진전이 되도록 하라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바울은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심문을 받음으로 재판관들과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1:13)
바울 사도는 빌립보에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수와 온 가족에게 복음 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행16:27~34)
성도가 고난을 당하면 그로 인해 성화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현장에 원수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있습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하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더욱 존귀해지고 유다 민족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습니다. “왕의 능력 있는 모든 행적과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사적이 메대와 바사 왕들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에10:2~3)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정하려면 복음에 스스로 매임이 있어야 합니다.
2. 스스로 매이라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1:14) 바울의 매임을 보고 바울 주위에 있던 믿음의 사람들이 더욱 담력을 얻었습니다. 바울의 매임과 갇힘은 믿음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음을 증명했으며,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고통이 와도 믿음을 지켜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주기철 목사님이 존경받는 것은 그가 모진 고문을 견디며 신앙을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존경받는 것도 두 자녀를 죽인 자에 대한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사랑의 원자탄”이라 부릅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일제의 박해가 교회에 유익을 준 부분도 있습니다. 핍박으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타협 없는 신앙의 유산을 남겼고 참 성도와 참 교역자를 구별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매임은 주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었고, 재판관과 총독, 간수 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17:3)
또, 바울을 따르는 자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드려 복음 전하는 자로 알게 하는 유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 오랜 세월 자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한나의 믿음이 성숙했습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1)
이 기도는 나실인, 곧 구별된 사람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한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식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나실인이 필요했기에 ‘하나님의 사람’을 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3. 기쁨의 근원을 찾으라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보다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에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교회의 사명도 영혼구원입니다. 영혼구원 없는 선행,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지 않는 사역은 육신의 운동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영혼구원을 위해 외로움, 고난, 환난, 박해, 감옥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빌 1:15~17)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따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비아냥거리면서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예배당을 건축하면 ‘건물에 돈을 너무 많이 쓴다. 가난한 사람이나 주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 보니 복 많이 받고 후손이 잘되겠구나!’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목회자가 약하면 ‘저토록 무리해서라도 주의 일을 하는 것을 보니 성령에 감동되고 영혼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주님이 목사를 강하게 할 수 없느냐, 기도하는데도 약하니 이해가 안 간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출애굽 할 때, 홍해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과 원망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목이 마를 때도 기도하는 사람과 불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며 참 기쁨의 근원을 발견합니다. 신령한 눈을 열어 하나님이 예비한 복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일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신앙의 바른 자세는 예수님 중심의 삶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를 증명해 주세요, 복 주세요. 다른 사람보다 높여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실패합니다. 내가 진짜고 너는 가짜라는 식의 기도와 가치관도 문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체에 행복해했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만을 그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고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신앙의 유익이 되도록 살아갑시다. 우리의 기도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속한 것인지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것인지 살펴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리고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어디인지 살펴봅시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언젠가는 탄식할 날이 옵니다. 지상의 것들은 계속 변화하고 쇠락해갑니다. 세상의 환경과 육체는 무너지나 영혼은 영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
세상이 줄 수 없는 주 안에서 얻어지는 기쁨, 환경을 초월하여 생기는 주님 주시는 기쁨, 바울이 감옥에서 가졌던 영원한 기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오늘 처한 환경을 보고 교만하지 말고 혹은 원망이나 낙심하지 말고 늘 복음전할 환경으로 만들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