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원 목사의 무비 앤 바이블
영화 <디바>는 ‘여신’이라는 뜻의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정상의 자리를 탐하는 다이빙 선수들의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자 다이빙 선수 이영(신민아)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처지는 수진(이유영)과 팀을 이룹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다이빙을 해 온 단짝 수진에 대한 우정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린 시절 다이빙을 시작할 때에는 이영과 수진의 처지가 지금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수진이 1등이었고 그보다 못한 이영은 수진에 대한 열등감을 가졌지요. 수진과 이영의 실력이 역전된 건 어떤 사건 때문인데, 어린 시절 중요한 대회에서 이영은 입수를 앞둔 수진에게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말 한마디를 건넸습니다.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하필 그때 그래야만 했을까요. 게다가 코치는 경기력에 지장이 있을까 봐 어머니 소식을 절대 수진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미 신신당부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평정심이 흔들렸던 수진은 다이빙대에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당하고 그 이후로 그녀의 실력은 추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진은 금지된 약물을 복용하면서까지 실력을 높이려 합니다. 이영이 이를 알고 만류하자 수진은 어린 시절 그 일에 대해 따져 묻습니다. 내심 ‘내가 1등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 아니었냐는 거죠. 게다가 약물을 말리는 이유도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봐’ 그런 것 아니냐고 일침을 날립니다. 두 사람은 승용차에 동승한 채 말다툼을 벌이다 강물에 추락하는 교통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이영은 구조되지만 사고 당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수진은 실종상태입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마음에 괴로워하는 이영은 이제껏 자신을 향한 수진의 미묘한 감정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혼란에 빠질 뿐 아니라 좀처럼 옛 기량을 되찾지도 못합니다. 은근히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후배에게 몽니를 부릴 정도지요. 구차하게 행동하는 이영을 향해 스포츠 에이전시는 “더 이상 추해지지 말라”며 핀잔을 주는데, 이 대사는 영화가 담고 있는 추락의 정서를 잘 대변합니다. 이후 이영은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야기는 파국을 향해 달려갑니다.
다이빙이 표상하는 추락의 개념과 질투의 정서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다이빙이라는 소재인데, 다이빙이란 최고가 되기 위해서 가장 아름답게 ‘추락’해야 한다는 역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장 아름답게 추락함으로써 정상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 기한이 다하면 초라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추락하게 된다는 설정도 이 영화의 매력입니다. 다이빙이 표상하는 ‘추락’이라는 개념은 이 영화의 핵심적 사건인 자동차 추락사고와 조응하면서 영화의 주요한 메시지를 함의합니다.
그런데 이영의 추락은 외적인 원인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기인합니다. 그것은 바로 ‘질투’라는 감정이죠. 어린 시절 수진에 대한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된 이영의 질투, 처지가 뒤바뀌어서 자기가 있어야 할 디바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영에 대한 수진의 질투, 실력도 안 되어 보이는데 이영 옆에서 파트너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수진에 대한 후배들의 질투, 이런 모든 질투들은 이 영화를 꿰뚫고 있는 주된 축입니다. 이 질투란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아니 빼앗아서라도 그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파생한 것이지요.
2인자의 질투, 대중문화의 단골 소재
<크랙>(2010)이라는 영화는 <디바>와 마찬가지로 ‘질투’ 그리고 ‘다이빙’ 이 두 가지 소재를 모두 다루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데요. 1930년대 영국의 여학교에 다이빙 교사로 부임한 미스G는 특유의 매력으로 여학생들로부터 숭배에 가까운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또래 집단의 리더 격인 디는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애를 쓰며, 약간의 인정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그녀와 교감하는 특별한 관계를 이뤘다고 뿌듯해하죠. 그런데 예쁘고 다이빙도 잘하고 게다가 귀족 집안 출신 피암마가 전학을 오면서부터 이들의 관계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미스G가 피암마에게 집착하고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가 되면서 디의 질투심이 촉발하게 되고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영화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소녀들의 미묘한 질투심을 소재로 합니다. 그 질투심이란 리더의 자리를 뺏은 자를 향한 것이자 자신과 정서적으로 교감해 오던 자를 뺏기는 데서 비롯된 것이며 강자에게 인정받는 유일한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디바>처럼 2인자가 1인자를 향해 갖는 질투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파국적인 이야기는 사실 새롭지 않습니다. <첼로-홍미주 일가 살인사건>(2005)이나 <여고괴담3-여우 계단>(2003)은 질투를 소재로 할 뿐 아니라 그 서사가 <디바>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아마데우스>(1985) 또한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를 향한 범재의 질투를 그렸다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지요. 질투를 소재로 하는 영화 또는 창작물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질투가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해당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예 노골적으로 <질투는 나의 힘>(2003)이라는 영화가 있을 정도지요.
질투심에 사로잡혀 파멸하고 마는 성경의 인물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유력한 집안 출신으로 잘 생기고 키가 컸습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다’(사무엘상 9:2)라고 진술할 정도였죠. 게다가 그는 종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이고 정치적 반대파에게도 관대함을 베풀 정도로 성품까지 겸손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민족과의 전투에서 적장 골리앗에게 수세를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다윗이라는 자가 나타나 골리앗을 쳐서 죽입니다. 조국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지요. 백성들은 왕 사울보다 다윗을 칭송하게 됩니다. 다윗에 대해 강렬한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낀 사울은 다윗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진 나머지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울은 결국 파멸하게 되지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도 질투가 엿보입니다(창세기 4:1-15).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면서 그의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분노했고 분풀이로 애꿎은 아벨을 죽입니다. 동생 아벨에 대한 질투가 가인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죄에 대해 벌을 내리시고 가인은 에덴 동쪽 땅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자 민심이 예수님에게로 향했던 것이고, 종교지도자들은 이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알량한 자존심에 더해진 질투와 탐욕은 그들로 하여금 큰 악을 저지르게끔 하는 동인이 되었습니다.
자기파괴적인 질투의 감정을 제어하려면
질투는 많은 경우 자신에게 손해를 가져옵니다.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법이지요. 잠언 기자는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잠언 14:30)고 훈계했습니다. 질투의 감정을 품고 산다는 것은 자기 몸과 뼈에 썩을 정도의 상해를 입히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뜻이죠.
기독교의 전통에는 교만, 질투, 탐욕, 탐식, 분노, 정욕, 나태라는 일곱 가지 죄악의 목록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 목록은 4세기경 수도사들이 처음 만든 이래 지금까지 전해 내려올 뿐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 <세븐>(1995)의 소재가 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그 치명적인 죄의 목록에 질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질투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이렇듯 자기파괴적인 질투의 감정을 잘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평등’에 대한 성숙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평등’이란 좋은 의미이지만, 무조건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얼핏 모두가 같은 것을 누려야 옳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각각 다르게 지으셨고 각자에게 다양한 환경과 능력과 기질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지으신 바에 따라 각각 다른 양상의 삶을 살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기계적 평등주의 뒤에는 남의 것을 뺏고 싶어 하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동료의 성공이 나의 성공을 제한하지 않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동료가 성공하게 되면 내가 거둘 수 있는 성공의 양이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몫을 지키기 위해 동료의 것을 빼앗거나 동료를 끌어내리려 하지요. 하지만 많은 경우 성공의 총량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동료의 성공이 나의 실패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지요.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경쟁자의 성공은 공동의 몫, 소위 ‘파이’를 키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셋째, 신자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질투는 대체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고라 일당이 모세와 아론이 가진 권위를 시샘하고 질투한 나머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세가 곧바로 반격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자고 요청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민수기 16:1-11).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상대화할 때, 질투는 자기발전의 동력으로 선용 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이 있을까요.
넷째,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다니엘 3:18)의 신앙이 요구됩니다. 자신에게는 남보다 우월한 게 조금도 없다고 생각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수준 높은, 근사한 태도일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고린도후서 6:9-10).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이 우스개처럼 사용되지만, 그 안에 진리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고찰이 진부하고 순진무구한 치기로 느껴지거나 소위 ‘대인배 코스프레’라고 여겨진다면 질투에 사로잡혀 파멸하고 마는 인간군상들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부질없는 상상이긴 하지만 애초에 이영이 수진에 대한 질투심을 잘 다스렸으면 어땠을까요? 두 사람이 싱크로나이즈 종목(2명의 선수가 한 팀을 이루어 동시에 낙하하여 연기하며 입수하는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지 않았을까요? 영화 <디바>의 후주는 매우 관습적입니다. 안일하다고 생각될 정도지요. 하지만 그 관습적인 후주가 어쩌면 우리에게 교훈을 던져주는 것은 아닐런지요.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