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다시 소망을⑥] 코로나: 우리 세상의 종말

오피니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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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맥퍼슨 목사(미국 샌디에고 락 처치)

코로나 바이러스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병원? N95? 인큐베이터? 집중치료실? 전염? 뉴욕시티입니까? 그렇다면 죽음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듯이 저 역시 코로나19로 친구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은 실제이고 많은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걸려 죽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8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코로나19로 인한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저는 집중치료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로부터 코로나19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코로나19는 신체가 기능하기에 충분한 공기를 공급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가 가쁜 숨을 내쉬고 힘겹게 심호흡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녀는 환자의 격리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병원은 방문객 허용을 금지하기 때문에 일단 응급실에 들어가서 코로나19 환자로 확인되면 병원을 떠날 때까지 가족들과 친구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무균 병실에 격리되게 된다고 했습니다.

환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고 만약 죽게 된다면 우주복 같이 낯선 옷을 입은 사람 곁에서 마지막을 보내야 합니다. 또한 인공호흡기 마스크가 씌워진 채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코로나19로 인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해서 잘 믿고 싶어하지 않지만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것입니다.

또 다른 공포의 근원은 배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음모론입니다. 이것은 세상 끝에 대한 시작입니까? 짐승의 표를 받게 되는 일이 일어날까요? 아니면 전 세계 단일 정부의 시작입니까?

아무도 정확히 모르지만 제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는 잘못된 것, 잘못된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죽음은 우리가 마음 속에 붙잡고 있는 것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삶의 죽음으로 마스크나 체온 측정 없이 이벤트를 즐기거나 마켓에서 쇼핑을 하는 일상적인 삶이 아닙니다. 이 삶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더 강력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혼돈의 시간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주시하고 계시다고 확신합니다. 종종 "왜 이런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나쁜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바꿔봅시다. 그리고 이 질문 대한 저의 대답은 "과거를 생각하십시오"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직면했을 때 사울 왕은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난 날을 떠올렸습니다. 어려움이 직면하자 다윗은 "오래 전 사자나 곰이 내 양 하나를 삼키려 할 때 나는 그것들의 입에서 양을 구하고 사자와 곰을 죽였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때 나를 사자와 곰에게서 구해주셨다면 이 블레셋 사람의 위험에서도 구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코로나19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시련의 시간에도 신실하게 당신과 함께 하셨고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해 우리 삶 속에서 당신을 더욱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 더욱 의지하는 것은 죽음과 같은 말입니다. 즉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죽음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고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내려 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코로나19 동안 반드시 죽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세상에 대한 확신의 죽음
2. 자기 중심적 삶의 죽음
3. 한계의 죽음

이들이 죽으면 누군가 산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첫째,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확신에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말 그대로 뒤집혔다고 봐야 합니다. 주요 기업은 파산 신청을 하고 문을 닫고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있으며, 노숙자들은 이전에 볼 수 없었을 만큼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서야 하고 스포츠 경기가 취소되었습니다. 저축 및 은퇴 계획 또한 고갈되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4~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굳건한 기초 위에 서게 되면 폭풍이나 바이러스, 실업이 닥쳐와도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확실성이 죽고 하나님 진리를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진리가 우리의 상황보다 더 크다는 새로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당신의 필요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세상적 확신에 대한 죽음은 세상의 것들을 의존하지 않을 때 시작됩니다. 대신 하나님의 확실성과 신실함에 안주하십시오. 그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둘째, 우리가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죽음은 자기 중심성의 죽음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기적이 될 수 있는 이 시기가 서로를 돌아보는 시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에는 컨벤션 센터에 약 1,000여 명의 노숙자가 거주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노숙자들에게 음식과 의료, 안전 등을 제공하는 50여 명의 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저에게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태복음 25:31~40)

그들은 실제로 배고프고, 목 마르고, 헐벗고, 아픈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예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모든 노숙자들 안에서 예수님을 찾도록 격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감정적, 정신적, 영적으로 서로 교통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우리는 자기 중심적 삶의 죽음을 가져와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가족을 먹이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두 번째 큰 계명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 이상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계명을 성취하고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 이상이 필요합니다. 낙심 한 사람들을 섬기고 전염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돌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일을 찾아보십시오.

셋째, 코로나19를 통해 배운 교훈은 우리 삶에 능력이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1~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세상의 불확실성보다 말씀의 확실성에 의지 할 때, 우리 삶에서 그분께서 일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사라지면 타자 중심적으로 살 수 있고 다른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파트너십을 만들게 됩니다.

중풍병자는 자신의 한계보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필요한 도움을 받기 위해 그들에게 의지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파트너 관계를 맺으면 한계가 사라집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고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을 모으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중풍병자를 도왔던 4명은 친구를 돕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그의 한계를 넘어서 기적을 보게 됐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은 장엄한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스페인어를 배울 때 언어의 모든 분위기나 발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원어민이 스페인어를 가르쳐줬는데, 그들은 제가 언어를 배우도록 도와줬을 뿐 아니라 저의 한계를 제거해 주었습니다. 지금 저는 스페인어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것은 우리 자아가 죽고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출 때, 우리의 한계는 죽고 새로운 기회로 태어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섬기는 사람과 우리들 모두 번영과 성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 때문에 완전히 달라 보입니다. 아마도 이 기간 동안 우리가 볼 수 없는 구원자를 더욱 신실하게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시간은 개인의 세계가 죽음을 맞이하고, 위기가 아닌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움이 우리 마음속에 샘솟는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붙들고 있는 것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충만함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마일즈 맥퍼슨 목사(미국 샌디에고 락 처치)

* 미주 기독일보는 최근 미국 크리스천포스트가 출간한 서적 ‘어라이즈 투게더’(Arise together)를 18회에 걸쳐 번역 게재합니다. 이 책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현지 복음주의 목회자들의 교회 본질 회복에 대한 외침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