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원 목사의 무비 앤 바이블
<기기괴괴 성형수>는 동명의 웹툰(인터넷 웹사이트에 게재되는 이미지 형식의 만화)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입니다. 외모 때문에 차별적인 대우를 당해오던 주인공은 우연히 ‘성형수’라는 신기한 물을 접하게 됩니다. 이 성형수는 마음먹은 대로 외모를 바꿀 수 있게 해주는 약품이지요. 성형수를 써서 예뻐진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전과는 다른 대우를 받게 되고, 심지어는 연예계에 진출하게 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주인공의 계속된 열망은 한순간의 실수와 어우러지게 되고 이야기는 파국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 작품은 외모지상주의를 풍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보다 높이기 위해 외모에 집착하는 인간군상들을 그려냄으로써 외모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다시피 하는 세태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지요. 자연히 외모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과 비극이 뒤따릅니다.
사실, 이 작품의 소재나 내용은 그다지 새롭지는 않습니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창작물들은 너무나 많기 때문이죠. 아예 대놓고 <외모지상주의>(2014~현재)라는 제목을 내걸면서 직설적인 태도를 취하는 웹툰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인 것이지만 현실세계에서 상대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해서 ‘누가 더 아름다운지’를 놓고 인간들은 종종 다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대립과 암투는 영화의 소재로 제격이지요. 인간의 아름다움이 영원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로(不老)의 미(美) 또한 단골 소재였습니다. <요가학원>(2009)이라는 영화는 이러한 소재들이 모두 담겨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습니다.
외모지상주의를 다룬 작품들은 그 시도 자체가 이미 비판적 시각을 전제로 하며 대체로 관객에게 반성적 사고를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뚜렷한 한계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를 꼬집지만 한편으로는 긍정
외모지상주의를 지적하면서도 오히려 은근히 외모지상주의를 긍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녀는 괴로워>(2006)나 <뷰티 인사이드>(2015)는 등장인물들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이야기인데요. 관객은 영화의 메시지에 크게 공감하면서도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는 외모지상주의를 꼬집는 서사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역설적으로 당대 최고의 미남미녀였기 때문이거나, 주인공들의 연애장면이 동화같이 예쁜 화면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지기 때문인데요. 이는 영화라는 매체가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야 하는 불가피한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대안이 없을지 의구심을 갖게끔 합니다.
웹툰 <여신강림>(2018~현재) 또한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화장을 하지 않은 소위 ‘쌩얼’을 들키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며, 주인공 편에 선 인물들의 외모는 근사하게 묘사되는 반면 상대적으로 못생긴 캐릭터들은 악역으로 그려집니다. 외모에 대한 인신공격성 대사 또한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작품의 주된 독자들인 청소년을 겨냥한 전략일지는 모르나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그릇된 시각을 심어줄 우려가 다분하겠지요.
외모지상주의, 판타지를 사용해야만 극복할 수 있어
또 다른 부류는 외모지상주의를 다루기 위해 비현실적 소재, 소위 ‘판타지’를 사용하는 작품들입니다. 헐리우드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2001)는 초고도비만이라 할 정도로 뚱뚱한 여성에게 반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남자 주인공은 최면에 걸린 채 몹시 뚱뚱한 여성에게 구애를 하는데, 그 최면이란 못생기고 뚱뚱한 사람을 잘생기고 예쁘고 날씬하게 보이도록 하는 비현실적인 것이었지요. 그는 최면이 풀려 상대방의 실제 외모를 인지하게 되자 많이 갈등하지만, 결국 외모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고 여성과 행복한 결말을 만들어냅니다. 영화는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교훈을 주며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일단 뚱뚱한 여성에게 반하기 위해 남자 주인공은 최면에 걸려야만 했습니다.
<아이 필 프리티>(2018)는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저 그런 외모에 늘 불만이었던 주인공은 예뻐지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고, 헬스 클럽에서 운동을 하던 중 넘어져 머리를 부딪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자신이 엄청난 미인으로 보이게 됩니다. 자신의 외모가 바뀌었다는 착각 덕분에 그녀는 매사에 자신감을 갖게 되고, 당당해진 그녀의 언행은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켜 예뻐진 것 이상의 효과를 얻게 되지요. 영화는 밝고 유쾌하며 결론은 건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주인공이 자존감을 갖게 되는 계기는 자신이 최고의 미인이 되었다는 ‘착각’ 덕분인 것이지 정상적인 분별력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는 외모지상주의로 인해 자괴감에 빠진 여성들에게 일침을 가하고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머리를 다쳐 환상에 빠진다는 판타지가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외모지상주의라는 견고한 현실세계의 벽은 판타지를 사용하지 않는 한 넘을 수 없는 것일까요.
그럴 법하지만 씁쓸한
스페인 영화 <어글리 우먼>(2001)은 무척 독특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못 생긴 여인’이 유전공학의 힘을 빌려 최고의 미녀로 변모합니다. 그런데 미녀가 된 자신을 환대하는 세상에 환멸을 느낀 그녀는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급기야 미인대회 현장에서 끔찍한 살인극을 벌이려 합니다. 마침내 그녀는 경찰에 체포되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자신을 체포한 형사의 면회를 받게 되지요. 그전까지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했던 그녀는 의외로 형사에게는 마음을 열고 대화를 시작합니다. 놀라운 것은 형사가 그녀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형사는 사실 지극히 흉측한 외모를 지녔지만 이제껏 가발과 의안 등으로 자신을 감추고 살아왔던 것이지요. 영화는 주인공과 형사가 교감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끝이 납니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슈렉>(2001)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주인공 피오나 공주의 외모는 추합니다. 일반적인 ‘공주’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에 가깝지요. 결말에서 그녀는 흉측한 괴물 슈렉과 결혼합니다. 일견 이러한 결말은 대단히 건강한 것 같지만, 결국 외모가 비슷한 사람끼리 동병상련의 정서가 뒷받침되어야만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읽히게도 합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외모지상주의를 풍자하지만 한 편으로는 추한 사람과 연대할 수 있는 이성은 마찬가지로 추한 사람일 뿐이라는 씁쓸한 메시지를 함의하는 것 같습니다. 보는 이로서는 ‘인정하기는 싫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씁쓸한 현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자기파괴적 전개와 결말
<기기괴괴 성형수>에서 주인공은 예뻐지고 싶은 나머지 거액의 돈을 무리하게 들여 성형수를 구매합니다. 성형 과정에서 부모의 헌신도 뒤따르게 되지요. 아름다움에 대한 주인공의 열망은 끔찍한 범죄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남을 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도 작품의 제목처럼 기괴하면서도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됩니다.
제목부터 직설적인 웹툰 <어글리 피플즈>(2020) 또한 주인공의 파국을 그리는데요. 주인공은 못생긴 외모 때문에 직장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잘생긴 동료를 질투합니다. 그는 멋진 외모로 늘 사람들의 호의를 얻는데 심지어 주인공이 흠모하는 여인과 사내연애 중입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신에게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이 못생겨지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고, 곧 그의 소원대로 이루어집니다. 주인공은 잠깐의 행복을 누리지만 곧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되고 세상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결코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이 두 작품에서 각각의 주인공은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묘사됩니다. <기기괴괴 성형수>의 주인공은 예쁜 여자 연예인에 대한 인터넷 기사에 악성 댓글을 다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성형수를 구매하기 위해 부모에게 2억원이라는 돈을 요구할 정도로 철없는 여성입니다. <어글리 피플즈>의 주인공은 피해의식에 빠져 있는 소심한 캐릭터로 짝사랑하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그녀의 연인을 음해할 뿐 아니라 정작 그녀를 얻게 되자 외모가 마음에 안 든다며 바람을 피우는 속물적인 캐릭터이지요.
이들은 외모 때문에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 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감독(작가)은 이들의 언행을 조금도 긍정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서 관객(독자)에게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한편 주인공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게끔 합니다.
외모지상주의를 다루는 작품들이 자기파괴적인 전개와 결말을 맺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겠지요. 이는 아마 외모지상주의를 날카롭게 꼬집기 위한 창작자의 의중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외모지상주의가 옳지 않다는 것은 세상이 다 공감하는 보편적 정서이므로 창작자로서는 멋진 외모에 집착하는 주인공을 엄중히 질책함으로서 보는 이의 공감을 얻어낼 필요가 있겠지요. 이는 대중예술이 취하는 자연스러운 선택일 것입니다. 관객으로서는 파국적 최후를 맞는 주인공을 보며 ‘맞아, 외모지상주의는 나빠!’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둘러싼 외모지상주의가 파국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견고한 것임도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미남미녀들의 이야기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미남미녀로는 다윗과 에스더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다윗의 젊은 시절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진술합니다(사무엘상 17:42). 사울 왕에 대한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도망간 다윗에게는 4백여 명의 추종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울 왕의 폭정으로 인해 억울하게 어려움을 당하거나 빚을 지게 된 자들이었습니다(사무엘상 22:1-2). 그런 사람들이 단지 다윗의 겉모습에 반해 그를 따랐다고 볼 수는 없겠지요. 다윗에게는 그들을 품을 만한 리더십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의 준수한 외모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그의 리더십에 보탬이 되었던 것만큼은 분명하겠지요. 성경은 다윗의 외모를 굳이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후대 독자인 우리에게 다윗의 겉모습에 주목하기보다는 그의 배후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타락해버린 사울 왕국을 폐하시고 다윗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세우시려 했던 것이죠. 다윗의 매력은 그의 외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의 배후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에스더라는 미녀도 지나칠 수 없겠지요. 그녀는 유대인으로서 바사 제국에 끌려간 포로 신분이었는데 바사 왕의 눈에 들어 왕후가 됩니다. 물론 그녀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녀의 미모 덕분이었죠. 성경은 그녀를 가리켜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고 진술합니다(에스더 2:7). 왕후가 된 그녀는 유대인을 몰살시키려는 적들의 계략을 물리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현대 성경 독자들은 ‘에스더’ 하면 바로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16)라는 그녀의 각오를 떠올릴 정도로 에스더는 믿음의 여인으로 통합니다. 게다가 미모까지 갖추었으니 자연히 현대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겠지요. 오늘날에도 딸의 이름을 에스더로 짓는 일이 빈번하며, 교회에서 여성들의 모임이나 단체가 ‘에스더’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에스더는 바사 왕 고레스가 포로 귀환 칙령을 내린 이후에도 고향인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사 왕궁에 눌러앉아 살기를 원했던 자입니다. 이는 당신의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뜻과는 부합하지 않는 불순종이었지요. 그러므로 그녀를 ‘신앙 좋고 미모까지 갖춘 여성’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단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녀를 바사 왕의 왕후로 세우시고 그녀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시려고 그녀에게 미모를 주신 것뿐이지요. ‘절세미인 에스더’의 배후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던 겁니다.
이렇듯 성경은 주인공의 빼어난 외모를 누락하지 않고 담담하게 진술합니다. 구약시대에서도 외모지상주의의 흔적을 희미하나마 찾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은 외모에 집착하는 찌들은 인간군상이 아니라 주인공의 외모를 당신의 거대한 구원 사역에 사용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남녀를 통틀어 성경에서 가장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는 압살롬이 아닐런지요. 이스라엘의 그 어떤 사람도 압살롬만큼 잘생기지는 못했으며, 압살롬에게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무런 흠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사무엘하 14:25). 자연히 압살롬의 출중한 외모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습니다(사무엘하 15:6-12). 이는 아버지 다윗 왕을 거스르는 반역의 동력이 되었지요. 그런데 압살롬의 아름다움을 대표해주던 그의 머리털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최후를 이끌어냅니다. 다윗 군사들과의 교전을 피해 노새를 타고 달아나던 그의 머리털이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그는 죽임을 당하게 되지요(사무엘하 18:9).
<기기괴괴 성형수>에서 주인공은 비단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뿐만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 하는 강렬한 욕망에 지배당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환대받기 위한 방편이 외모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구약성경의 압살롬은 그의 출중한 외모 덕분에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습니다. 그런데 선망의 대상이던 그의 머리털은 저주(신명기 21:23)의 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외모지상주의의 허망한 결말이 아닐까요.
아름다움 너머를 봐야
아름다움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따지고 보면 창세기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게 된 것도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창세기 3:6) 때문이었죠. 우리 눈에 보기 좋은 것은 인간의 분별력을 흐리게 하고 결국 죄악으로 이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한 외관에 감탄하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헤롯 왕이 46년에 걸쳐 완공한 성전의 위용은 대단했지요. 하지만 아름답고 장엄한 외관과는 달리 성전은 ‘강도의 소굴’(마태복음 21:13)로 전락해 버린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외형에 감춰진 성전의 부패함을 보시고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마가복음 13:1-2).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제자들처럼 눈에 보이는 화려한 외형에 미혹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쳤다’고 진술하는데(사무엘하 15:6), 이 단어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도둑질’로 번역되는 히브리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압살롬의 겉모습에 현혹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을 도모하는 그의 속내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지요.
성경은 마치 외모가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것처럼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란 외모, 다시 말해 보이는 것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하지만 외모지상주의를 긍정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외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 아름다움 너머의 것을 통찰하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계시의 방편이 그림이나 영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건조한 텍스트라는 점 또한 보이는 것에 쉽게 미혹 당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감안한 하나님의 배려는 아닐런지요.
#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