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문학을 전공하던 시절, 니체의 저서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 하나 때문이었다. “신은 죽었다”(Gott ist tott)란 말이다. 읽긴 했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솔직히 이해가 어려웠다. 특히 “신은 죽었다”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 신학을 공부하고 교수가 되면서까지 그가 정말 성경의 하나님을 부정한 것인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2] 체질상 궁금하면 견딜 수 없는 나이기에 그와 관련된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어렴풋했던 니체의 말이 선명해짐을 감지했다. 아직도 그 유명한 말이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궁금한 분들이 많을 게다. 오늘은 그에 관해 정리해보면 좋겠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실존철학의 선구자이다. 흔히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불린다.
[3]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것 때문이다. 이처럼 니체는 ‘정치 사상 문화 그리고 문명을 송두리째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근대성이라는 정신을 떨쳐버리고 지성사적 전환점을 이룬 철학자’. ‘2000년 서양 철학의 역사 동안 계속 유지되었던 플라톤주의를 전복시킨 철학자’로 알려진 참 유명한 사람이다.
[4] 당시 유럽사회는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고, 모든 문화와 가치의 기준이었다. 특히 기독교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플라톤은 세계를 ‘이상계’(이데아계)와 ‘현상계’로 나누었다. ‘이상계’는 ‘영구불변의 관념적, 정신적 세계’이고, ‘현상계’는 ‘생성, 변화, 소멸하는 현실적, 육체적 세계’이다. 이상계를 더 본질적이고 고차원적인 세계로 보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육체를 떠나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로 가는 것을 희구(希求)하였다.
[5] 기독교도 이분법에 따라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로 나누었다. 신의 세계는 불변하는 초월 세계인 내세를 말하고, 인간의 세계는 변화하는 현상 세계를 말한다. 기독교는 신의 세계를 절대적, 초월적 가치로 존중한다. 선과 악, 정의, 도덕 등 서구의 사상과 문화, 규범과 제도는 모두 이러한 초월적인 가치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초월적 가치는 현실의 모든 가치와 인간의 삶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정한다.
[6] 인간은 오로지 신에 의지하거나 신의 구원에 의해서만 내세에서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인간 스스로는 행복을 개척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구조화한 것이다. 예컨대, 밤에 혼자 산길을 내려오던 사람이 갑자기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되었다. 겨우 나뭇가지를 붙들고 살고자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기도하라, 그러면 구원될 것이다.”라는 울림이 들려왔다. 그는 사지와 온 몸을 모은 채 밤새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나 구조는 되지 않았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눈을 떠보니 새벽이 오고 있었다.
[7]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밑은 낭떠러지가 아니고 편편한 평지였다. 발을 뻗으니 바로 닿을 수 있었다. 그는 밤사이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며 자신을 자책했다. 살기 위하여 발을 한번 뻗어보았더라면 평지에 쉽게 발이 닿았을 것이다. 쓸데없이 공허한 하늘에만 의존했던 나약한 자신이 창피하였다. 자신이 충분히 타개할 수 있었음에도 하늘(신)만을 절대적 해결사로 생각한 것이다.
[8] 초월적인 가치는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정작 현실의 가치가 무시되거나 부정된다. 니체는 이러한 기독교적 이분법과 초월적 가치를 반대하고, 이를 타파할 것을 주장한다. 기독교가 종교의 이름으로, 구원이란 명분으로 인간을 나약화시키고 노예화한다는 것이다. 그 타파의 방법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신은 죽었다“이다. 여기서 신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정의 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니체가 기독교의 순수한 사랑의 정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9] 실제 자신의 책 속에서 니체는 그리스도를 위대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부정한 것은 기독교의 형이상학, 초월적 가치, 내세, 절대선, 도덕규범과 같이 그동안 인류가 떠받들어온 진리와 가치체계였다. 또한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비도덕적 행태, 부정적 이미지 등을 고발하고 성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찍이 기독교는 세인들의 지탄의 대상이었다.
[10] 종교개혁운동의 단서가 된 면죄부 판매, 신의 이름을 걸고 여덟 차례에 걸쳐 치러진 십자군 전쟁에서의 패배, 과학의 진실을 은폐한 갈리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재판, 진화론의 등장과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라 그 권위와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니체는 종교가 추구하는 절대 선(善)이나 초월적 가치가 이미 붕괴되었고, 사회를 제도하고 규율하는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였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11]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김경일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행하였다. 공자의 죽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유교 자체가 안고 있는 권위주의, 폐쇄성, 형식지상주의, 파벌주의 등을 비판하고, 당시 지배층의 도덕적 위선과 무능, 부패를 지적하고, 결과적으로 실용적 학문과 경제적 활동을 천시하다가 근대화에 뒤쳐진 것을 강조한 것이다. 신이 존재할 때 인간은 선과 악, 불행과 비극, 고통 등 모든 책임을 신에게 돌릴 수 있었다.
[12] 그러나 신이 없어진 상황에서 인간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희망도 없어지게 되었다. 이를 허무주의(니힐리즘; nihilism)라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니체는 초월적 가치 대신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이 죽고 난 뒤 인간은 더 이상 신에 의지할 필요도 없고, 의지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 신이 되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
[13] 신 대신 새로운 존재로 등장한 것이 바로 초인(超人, 위버멘쉬 ; Übermensch)이다. 인간중심주의의 표상이다. 니체는 인간을 ‘초인’과 ‘최후의 인간’(the last man, Der letzte Mensch) 두 부류로 나눈다. 최후의 인간은 기존의 가치를 믿고,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며,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진취적이고 창의적 사고 없이 기존의 가치규범에 예속되어 산다.
[14] 남들 대학 가니까 대학 가고, 남들 따라 투자하고, 남들이 좋다고 하니 따라 한다. 현대 사회 대다수가 이 부류에 속한다. 이에 반해 초인은 기존의 가치를 넘어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위험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다. 니체가 말하는 “고난을 견디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고난에게 얼마든지 다시 찾아올 것을 촉구하는 사람”이다.
[15]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아이 하나가 있다 하자. 아이는 이제 의지할 곳도 없고, 인도해 줄 사람도 없다. 이 상황에서 아이가 취할 태도를 생각해 보자. 이웃이나 국가의 도움을 받아 그냥 대충 살아가는 방법,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기 위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고 기술을 배우며 자신을 키워나가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다. 전자의 형태가 최후의 인간이고, 후자가 초인이다.
[16] 이밖에 살아가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허무주의에 대하여 굴복하고 패배하는 것이 된다. 니체는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충동적인 자살은 죽는 자와 남아 있는 자에게 슬픔만 안겨주며, 삶을 완성시키는 죽음도 합리적인 죽음도 아닌 비겁한 자의 죽음이라고 하였다. ‘자살 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17]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피할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Amor Fati’, 즉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사랑하는 것’(운명애; 運命愛)이다.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한 것은 허황되고 형이상학적인 관념에서 과감히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인간(삶)이라는 것을 중시하며, 허무주의의 도래에 대하여 운명이라는 것을 수용하고 사랑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18] 삶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는 어디에도 없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바로 자기 자신뿐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사람도 오직 자신뿐이다. 용기를 내어 자신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기존의 가치 따위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며 현실을 살아가라는 것이 니체가 현재의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19]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소개한 니체의 메시지에 대한 나의 소감을 좀 털어놔볼까 한다. 우선 니체가 건드린 것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들을 신봉한다고 했던 기독교임에 유의해야 한다. 중세 기독교의 부패상이나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을 처형한 사건이나 십자군 전쟁 등, 당시 기독교가 보인 부정적인 모습에 대한 비판의 의도에서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이 탄생한 것이다. 캘빈이나 루터가 개혁의 정신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20] 분명 우리는 니체가 비판한 당시 기독교를 우리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니체의 그런 순수한 의도와 동기를 잘 인식했음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 몇 가지 있다. 그가 아무리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정면 부정한 것은 아니라 해도, 그의 가치관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무신론적인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비판한, 당시 기독교의 부패상은 인정한다 치더라도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진리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21]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1-3).
성경은 육체의 장막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결코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22] 하지만 그와는 족히 비교가 안 되는 영원한 천상의 세계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라고 강조하고 있다. 플라톤이 현상계보다 이상계를 더 본질적이고 고차원적인 세계로 보고 강조했듯이 말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리얼한 현실이 분명하다. 희노애락이 있고, 위기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고, 돈이 떨어지면 굶을 수밖에 없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23] 그런데 우리의 육체적 시간이 끝난 이후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해볼 때, 영원한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 나라의 삶과 비교했을 때 지금 우리의 현실은 정말 눈 깜빡할 시간보다 더 짧은 찰나에 불과한 게 사실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세인들의 생각은 이전보다 더 부정적이라 할 수 있다. 왜 정부에서는 기독교만 억압하고 핍박하고 있는가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24] 그러나 지금까지 세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 기독교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게 사실이다. 물론 어느 종교단체보다 탈북민 사역이나 구제 사업에 주력했던 점들이 주목받지 못한 아쉬움과 억울함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정죄는 오직 기독교만이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참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에 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때문에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이 되어야 함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25] 아래에 소개하는 행 2:44-47절에 나오는 성령 공동체의 모습이 우리 한국 교회의 새로운 모습으로 대체되지 않는 한, 니체의 책망과 잔소리는 계속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신은 죽었다”라고 한 니체를 영원히 잠들게 하자!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