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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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명의전화 하상훈 원장. ©기독일보DB

매년 9월 10일은 세계 자살예방의 날이다. 200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국제자살예방협회(IASP)와 세계보건기구(WHO)가 전 세계에 만연한 자살을 막기 위해 모두가 책임성을 갖자고 정한 날이다. 자살이라는 킬러와 전쟁을 선언한 이 날을 우리나라도 2004년부터 지켜 오고 있다. 자살예방의 날이 되면 우리의 자화상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나라는 2018년 한 해 동안 13,670명, 하루 37.5명이 자살하였다. 10만 명당 26.6명이 자살하여 OECD 평균 자살률 11.5명의 두 배 이상이다. 자살자 뿐 아니라 자살시도자, 자살 유가족 등 매년 약 20여만 명의 자살 피해자들이 고통 받고 있다.

정부는 2018년 자살예방 국가행동계획을 확정하고 자살예방정책과를 신설하였다. 2019년에는 국무총리 산하 자살예방정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범부처적인 자살예방 대응전략을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노력만으로 자살예방이 가능할까.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가 탄생된 것도 자살예방에 대한 거버넌스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민관협의회는 6개의 정부부처와 종교계, 노사단체, 언론계, 전문가 단체, 협력단체 등 38개 기관 단체가 모여 자살예방에 적극 나서고자 모인 협의체다. 자살률을 줄이고 있는 선진 외국에서도 민간단체와의 연계와 협력을 자살예방정책의 핵심과제로 삼고 있다.

필자는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정부의 노력과 함께 민간의 역할을 더욱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모임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민간은 새롭고 창의적인 자살예방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먼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에서는 ‘생명을 지키는 일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라는 슬로건 하에 2020 생명존중 실천 슬로건 공모전 당선작으로 제작된 마스크 스티커 캠페인을 벌인다. 한국자살예방협회는 자살예방종합학술대회를 온라인으로 개최하여 코로나19 시대에 우리나라 자살문제와 대책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종교계에서는 지난 해 발간한 6대 종단 자살예방 지침서를 효과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강의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생명존중시민회의의 생명존중 유튜브 공모전을 포함하여 여러 단체에서 생명존중 표어제작 및 수기형태의 공모전 등을 통해 생명존중 문화를 확산하고 있다. 한국생명의전화는 그동안 전개해 온 범국민 생명존중 캠페인 ‘사람사랑 생명사랑 밤길걷기’를 같은 시간에 온라인으로 모여 각자 원하는 곳에서 걷는 LIVE WALK로 개최한다. 한 장소에 모이지는 않지만 ‘따로 또 같이’ 걸으며 생명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또한 지금 이 순간도 한강 19개 교량에서는 74대의 SOS생명의전화로 자살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2020 세계 자살예방의 날을 맞아 민관이 협력해야 할 일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먼저 생명존중문화 확산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보건복지부 자살실태조사(2018)에 의하면 자살을 권리로서 생각하거나 금기시하지 않고 허용하는 태도가 증가하고 있다. 종교계는 지역사회 내에서 생명존중문화를 선도하고 언론계는 자살보도권고기준을 철저히 엄수하며 교육계는 적극적인 자살 관련 연구와 함께 연령, 직군에 맞는 생명존중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자신과 타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인식을 정착시키려면 사회 전 분야의 협력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건강한 가정환경을 만드는데 힘써야 한다. 가정은 사회적 지지체계의 기초단위로써 가정이 서로 지지하고 보살피는 심리적 버팀목이 되도록 해야 한다. 정부에서는 일·가정 양립을 정착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실제 제도의 도입 및 이용에 있어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에 기업에서는 이러한 제도가 활용 될 수 있도록 조직문화 개선과 근로자들의 인식 개선 교육 등 변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 지난해 서울 성북 네 모녀 사건, 경기 양주 일가족 사망 사건, 인천 계양구 일가족 사망 사건이 우리 국민들을 우울하게 했다. 모두 정부의 사회적 안전망에 틈이 생겨 생활고, 사회적 관계의 단절이 동시에 작용해서 생긴 비극이다. 사각지대를 고려한 정책 제안과 지역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체의 회복이야말로 틈을 채우는 확실한 안전망이다. 촘촘한 안전망 구축을 위해서는 민과 관이 함께 대응하기 위한 민관 협치 운영이 필요하다. ‘관’은 공공영역 중심의 제도 개편과 조직 및 인력 확충 등 복지인프라를 확대하고 ‘민’은 지역 내 복지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복지 자치’로 나아가야 한다.

끝으로 정신 건강에 대한 인식개선이 필요하다. 정신질환을 바라보는 잘못된 편견과 차별적인 시선을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불안, 우울 등을 적기에 치료받지 못해 악화되면 자살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 정신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을 찾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국가는 정신질환 치료비용을 지원하는 등 신체 건강 뿐 아닌 국민의 정신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방안을 계속적으로 고민하고 시행해야 한다. 국민 스스로도 본인의 정신 건강을 계속 살피고, 필요할 시 전문적 도움을 요청하는 데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코로나19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코로나19로 대두된 K-방역만큼 자살에 대한 K-방역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자살예방을 위해 전 국민이 함께 노력할 때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자살예방의 날 우리는 구호가 아닌 생명사랑 실천으로 응답해야 한다.

하상훈(한국생명의전화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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