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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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당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추미애 의원은 정유라 씨의 ‘엄마 찬스’에 분노한 젊은이들을 위로하며 우리 사회의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바로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황교안 법무부장관의 병역 면제와 우병우 청와대 수석 아들의 군 운전병 특혜 의혹에 대해서는 공직자들이 사회의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무너뜨렸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던 그가 소속 정당이 여당으로 바뀌고 법무부 장관이 된 후에 보여준 정치적 행보는 그가 입버릇처럼 내세우던 공정과 정의와는 너무나 딴판이었다. 그는 조국 전 장관에 뒤이어 법무부장관이 된 후 현 정권과 관련된 수사를 지휘하던 검사들을 한꺼번에 몰아내고 친 정권 검사들로 요직에 포진시킴으로써 정권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인 윤석렬 검찰총장을 식물로 만들었다.

그런 추 장관이 아들의 군복무 특혜 의혹으로 연일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의 아들은 카투사 군 복무당시 휴가를 갔다가 복귀하지 않은 문제로 고발돼 검찰의 수사를 받아 왔다. 관련자 몇 명 불러 조사해 보면 금방 결론이 날 사건을 가지고 동부지검이 9달째 질질 끌면서 언론은 매일 새로운 의혹들을 쏟아내고 있다. 추 장관은 국회에서 이 문제를 따지는 야당 의원에게 “소설을 쓰시네”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내세운 국정철학은 ‘사회적 가치’이다. 이는 현 정부 운영의 핵심원리로까지 제시되어 왔다. 문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이던 제19대 국회에서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사회적 가치란 사회 전체가 함께 지키고 존중해야 할 가치를 말한다. 이를 테면 내가 혹시라도 남에게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옮기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갑갑하고 숨쉬기 불편해도 참고 마스크를 쓰는 것도 사회적 가치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아들의 카투사 병 근무당시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신분으로 아들에게 ‘엄마 찬스’를 부여했다면, 그리고 딸의 의전원 합격을 위해 논문 제1저자에 이름을 올리는데 ‘아빠 찬스’를 부여했다면, 이는 모두 이런 사회적 가치에 반하는 행위이다. 우리 사회는 이들이 목이 쉬도록 외쳤던 공정과 정의의 이면에서 몰래 누리고 있었던 반칙과 특혜에 배 아파하는 게 아니다.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가 민주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고 존중되어야 하는 것처럼 교회는 기독교적 가치라는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고 성장해 왔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그 바탕에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1~32)는 말씀은 기독교적 가치의 정점을 보여준다.

기독교적 가치는 때론 사회적 가치와 충돌할 수 있으나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뛰어넘는 정신에 기반하고 있다. 코로나19로 그 누구보다 피해를 입고 고통당하고 있는 교회들이 오히려 지역사회에 코로나19의 고통을 교회가 주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 그런데도 교회가 묵묵히 이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가치 이전에 기독교적 가치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김부겸 전 의원은 8.15광화문 집회를 주도한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를 겨냥해 “문재인 정부가 방역에 실패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종교의 탈을 쓴 일부 극우 세력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고 했다. “이들이 정부를 뒤흔들고 정권 붕괴까지 노린다”고도 했다.

아무리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게 정치인이라지만 여당 대표가 되겠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편향적이고 선동적이어서 그저 놀랍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일부 교회가 만들어 퍼뜨린 것이고, 문재인 정부는 방역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이 된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똑같이 하는 교계인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 목사를 기독교의 탈을 쓴 극우주의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단’으로까지 몰아가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나와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거나 불편하게 여길 수는 있어도 극단의 ‘이단’ 논쟁으로 끌고 가려는 것은 아예 목사를 저주하고 매장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 교회에서 천명이 넘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아무 잘못도 없는 교회들이 고통당하고 고개를 못들 게 만든 책임은 전적으로 전 목사에게 있다. 그런데도 사과나 자숙하는 자세가 아닌 모든 책임을 외부 정치적 환경에 돌리고 있는 모습 또한 분명 책임있는 지도자의 자세는 아니다.

그러나 교계 일부에서 이런 전 목사의 언행에 대해 비난을 퍼붓고, 예배를 대면, 비대면 예배로 구분해 갈라치기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떤 교회들이 세상을 향해 “죄송합니다. 사과합니다”라고 크게 쓴 현수막을 내걸어 사회적 책임에 부응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어느 한 사람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가 힘들어졌다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도 그 한사람을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고통의 짐을 지는 것이 기독교적 가치를 세상에 바로 세워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