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세가 제2차 대유행이 우려될 만큼 심각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보건을 담당하는 최후의 보루인 의료 시스템마저 마구 흔들리고 있다.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코로나19 확산에 이 정도로 선방해 온 것은 100% 의료진의 헌신 덕이다. 뜨거운 삼복더위 속에서도 방역복을 껴입고 구슬땀을 흘려가며 환자 곁을 지킨 의료진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정부가 세계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해 온 K-방역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환자 곁을 지키던 의사들이 하나 둘씩 가운을 벗어버리고 파업에 동참하고 있다. 정부가 서슬 퍼런 업무복귀명령을 내리며 ‘형사 처벌’ ‘의사면허 박탈 등으로 압박하고 있지만 요지부동이다.
의사들로 하여금 이 엄중한 시기에 가운을 벗어 던지게 만든 것은 먼저 정부의 책임이 크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7월 23일 2022학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400명 증원해 10년간 의사를 4,000명 늘리겠다는 정책을 발표함으로써 의료 갈등에 불을 질렀다.
주무장관이 의료계가 줄곧 반대해온 정책을 그 어느 때보다 코로나 확산 방지에 총력을 쏟아야 할 시점에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의사들이 여론에 떠밀려 대놓고 반발하기 힘든 시점을 일부러 택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단체들이 잇달아 파업을 예고했는데도, 보건복지부는 이를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의료계가 이토록 반발하는 핵심은 ‘지역의사제’이다. 정부가 내놓은 ‘지역의사제’는 국가 장학금으로 의사를 양성한 뒤 10년 동안 시골에서 의무 복무토록 한다는 안이다. 수도권 대도시에 비해 의료 낙후지역인 농어촌지역에 필요한 의사를 공급함으로써 의료 불균형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의사제’는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의료수준 저하라는 더 큰 화를 불러 올 수 있다. 의사가 되는 길이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지금도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들의 의료수준이 문제가 되는 사례가 적지 않은데 아예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마구 의사 면허를 준 뒤에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정부의 안에는 일정 부분 시민단체 추천으로 의대생을 뽑겠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의료계와 야당에서는 정부가 대놓고 특혜를 주어 아예 ‘돌팔이’를 양산하겠다는 것이나 뭐가 다르냐며 반발하고 있다. 비교적 쉽게 의사 면허를 딴 이들이 10년 의무 기간을 채운 후에 대도시로 들어와 개업할 경우 의료 서비스의 질적 저하로 인한 국민적 불신과 의료계 갈등이 증폭되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정부와 의료계 간 갈등이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여당이 유사시 의료인들을 북한에 차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또 다른 논란거리다.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남북 보건의료의 교류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안’과 같은 당 황운하 의원이 대표 발의해 입법예고 중인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그것이다.
이 법이 제정되면 북한에 재난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의사를 차출할 수 있게 된다. ‘인도주의’라는 단서가 달려있긴 하나 이 법의 취지대로라면 한국의 의사는 모두 국가 소유 즉 공공재라는 말이 된다. 인도주의 차원에서 남북협력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민간인 신분의 의사를 마음대로 차출하겠다는 발상만큼 비인도적인 것도 없다. 그래서 아예 법으로 강제하겠다는 것이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전공의에 이어 의대교수들까지 동참한 이번 의료 파업에 대해 의사들의 밥그릇 지키기 싸움이라고 비난하는 소리도 적지 않다. 그러나 1차적인 책임은 정부의 무능과 경솔함에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까지 나서 일방적으로 의사들을 공격하고 압박하는 것은 파업사태 해결과 국민 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통령은 정부를 대변하기 전에 국민 편에서 국민을 대변해야 한다. 코로나19라는 엄중한 상황에서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잊었다고 비난하기 전에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희생과 헌신을 다해 온 의사들의 뒤통수를 누가 쳤는지 생각해 보면 해법이 나오리라 본다.
지금은 정부가 섣부르게 발표한 정책을 중단하고 원점에서부터 다시 의료계와 협의해 합의안을 도출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의사들은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한 파업을 즉시 중단하고 각자의 의료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이 최선이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장기화하고, 감염 경로를 모르는 깜깜이 환자도 계속 증가하는 위기 상황이지만 정부도, 국민 누구도 의료진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며 돌을 던질 자격은 없다. 그러나 의사들이 가운을 벗어버리고 떠난 병상에 남겨진 아무 죄 없는 환자와 그 가족들, 나아가 온 국민이 그 고통을 대신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만은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