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야보고서 2장 14-26절
성경을 보면 두 가지 내용이 서로 충돌해 보이는 본문들이 있다. 예컨대 사도행전 2장 21절에 베드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여 구원이 우리가 믿을 때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에베소서에 1장 4-5절에 바울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라며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다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 15장에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8장에는 이방 땅 거라사에 가셔서 광인을 고치셨고, 요한복음 4장에는 이방 사마리아 땅 수가성 여인을 구원하셨다. 너무나도 상반되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위 내용들은 상반된 내용이 아니다. 성경의 한 문장, 한 문장만 보면 오해할 수 있지만 구원의 큰 그림을 이해하면 오히려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본문도 어떻게 보면 혼란스러워 보이는 본문이다.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먼저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내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말한다. 이 말은 성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은 더욱 불편하게 들릴지 모른다. 왜냐하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신칭의 교리를 허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허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근거를 뒷받침하는 본문이 마태복음 7장 16절에 나온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6) 이 말씀은 많이 들어 본 말씀으로 열매에 강조점을 두어 왔다. 그러나 이 본문은 열매가 아니라 품종에 목적이 있는 본문이다. 가시나무 품종에서는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 품종에서는 무화과를 딸 수 없듯이 먼저 열매를 보기 전에 품종을 확인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참 품종이라는 믿음이 확인되면 반드시 행함이라는 열매는 자연스럽게 뒤따라 온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야고보 사도는 두 사람을 들고 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 그토록 기다리는 아들을 낳았다. 근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바치라는 것이다. 여러분들 같으면 납득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는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함으로 순종했다. 둘째 기생 라합도 마찬가지이다. 라합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순종함으로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어 살려냈다. 이들은 참 믿음의 품종이었기에 행함의 열매가 나타난 것이다.
우리의 믿음에도 가짜 믿음이 있고 진짜 믿음이 있다. 오늘날은 가짜가 진짜 같고, 진짜가 가짜 같은 시대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무엇이 진짜인지 분별하기 힘들다. 여러분의 신앙은 참 품종 신앙인가? 거짓 품종 신앙인가? 자가 검증 시스템을 작동시켜 보아야 한다. 오늘 야보고 사도는 자가 검증 시스템에 이 항목을 대입해 보라고 한다. 15-16절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 의미를 알려면 본문의 수신자를 이해해야 하는데, 1세기 로마의 핍박 속에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핍박 가운데 믿음을 지킨 자들이다. 로마의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신앙적인 위협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불이익도 당해야 했다. 상거래의 제한을 당해야 했다. 공직이나 사회활동에 진출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힘겨운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자 점점 사람들은 약자,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데 인색하고 외면하는 것이 만연해졌다. 점점 유대공동체는 개인주의, 이기주의적인 신앙으로 흘러 버렸다. 그때 야고보 사도는 믿음을 아는 것으로 증명하려고 하지 말고 사는 것으로 증명하라고 설파한 것이다.
지난주에 친구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믿음은 아는 것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으로 증명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던 시간이었다. 친구 목사가 한번은 태블릿 PC를 사고 싶은데, 인터넷 중고 사이트에서 저렴하게 나와서 20만 원에 사게 되었다. 돈을 입금하고 물건을 기다리는데 연락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보니 사기를 당한 것이다. 시험에 빠졌다. 너무 괘씸해서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영혼이 왠지 모르게 안타까워 보였다. 사는 게 얼마나 힘들면 사기를 쳤겠나 싶어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어서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없는 형편에 어렵게 물건을 산 것인데 물건이 없으면 꼭 돈으로 돌려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혹시 힘겨운 상황에 있다면 꼭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예수님은 당신의 어려움도 이겨내게 하실 분이시라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난 뒤에 다시 답장이 왔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사실 자기가 사기꾼이 맞습니다. 정말 내 상황이 힘들어서 이렇게 사기를 쳤는데, 사장님의 문자를 받으니까 너무 미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보통은 사기를 당하면 협박하고 온갖 욕을 다하는데, 예수를 소개하는 메시지는 난생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메시지를 꼭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그리고 난 뒤, 돈이 생기면 사장님의 돈을 먼저 갚겠습니다.’ 그 답장을 받고 난 뒤에 친구 목사님이 정말 고마워서 문자로 커피 교환권까지 보냈다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눈으로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방법이야 어떠하든 행함으로 그의 믿음을 보인 것이다. 믿음을 아는 것으로 증명하려고 하지 말고 사는 것으로 증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