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원 목사의 <무비 앤 바이블>
영화에는 일종의 세계관이라는 것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는 영화가 현실의 모방이자 현실에 대한 은유임을 뜻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준거 기준으로 삼아 영화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숨 쉬고 있는 현실을 향한 기독교의 의미 있는 작업일 것입니다.
영화를 비롯한 서사들은 개인 혹은 집단 간의 갈등을 뼈대로 삼습니다. 그 갈등이 첨예하여 긴장이 커질수록 이야기의 매력도 커지지요. 그런 이유로 영화는 등장인물 간의 갈등을 극대화하기 위해 ‘추격’이라는 소재를 자주 활용합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간에 벌어지는 긴장과 대립은 특히 상업오락영화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근래 들어 많은 한국영화들이 ‘추격’을 주요한 소재로 삼습니다. 아예 대놓고 대중에게 이 점을 부각시키며 홍보하기도 합니다. 대중은 이 ‘추격’이 제공하는 재미에 매료되지요. 그렇다면 기독교는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소위 추격영화의 전형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남자 주인공은 쫓고 쫓기며, 살과 살을 맞부딪히며 혈투를 벌임으로써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이 영화 속 쫓는 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무도한 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친형이나 다름없는 이를 죽였다는 이유로 상대방 주인공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는 구실에 불과합니다. 그는 그저 잔인무도한 살인을 즐길 뿐입니다. ‘이럴 필요까진 없지 않냐고 내게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즐긴다’는 식의 대사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은 쫓는 자에게 있어 이 일이 일종의 유희임을 암시합니다. 영화 속 대사들은 관객을 추격의 유희장으로 은근히 초대합니다. ‘그 백정 놈이 곧 우리한테도 들이닥칠 거야’라는 대사는 관객에게 ‘이제 너희도 쫓기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두 시간의 추격 서사에 감정이입하라는 것이죠. 마지막에 ‘결국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지 않았나?’라는 대사 또한 마치 관객을 향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들은 쫓고 쫓기는 추격의 긴장감과 그로 인한 피상적 유희를 즐기러 온 것 아니냐고 말이지요.
<사냥의 시간> 또한 노골적인 추격영화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쫓는 자가 쫓기는 자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이지요. 쫓는 자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닌 잔인무도한 킬러이고 쫓기는 자는 평범한 이십대 청년 네 명입니다. 그런데 쫓는 자는 이들을 막다른 길에 몰아붙여 놓고서는 뜬금없이 달아나 보라고 기회를 줍니다. 부디 실망시키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그는 인간 사냥 자체가 목적이기에 짐짓 사냥감을 놓아주고 즐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즐기려는 자신의 욕망을 지속시키려 했던 것이지요. 이후로 영화는 마치 야수가 초식동물을 쫓는 것처럼 진행됩니다. 별다른 서사도 없고, 그저 추격만이 이어질 뿐입니다.
<반도>는 소위 ‘좀비영화’이지만 좀비보다는 인간들 간의 추격이 두드러집니다. 영화 속 군인들은 주인공 일행을 추격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진지 밖, 좀비들이 창궐하는 도시를 위험을 무릅쓰고 통과하면서까지 주인공 일행을 추격해서 별로 얻을 것도 없는데 말이지요. 이는 결국 카체이싱(자동차 추격장면을 지칭하는 영화 용어)이 제공하는 장르적 쾌감을 만들어내기 위한 감독의 장치에 불과합니다. 군인들은 그저 쫓고 주인공 일행은 쫓기는, 추격의 속도감이 제공하는 영화적 유희를 관객은 즐기게 됩니다.
‘추격’ 서사는 관음증적 욕구와 맞닿아 있어
이렇듯 한국영화에서 즐겨 사용되는 ‘추격’ 서사는 상업오락영화의 목적과 의도에 잘 부합하기에 그 자체로 문제 삼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짚어볼 것은, 이 추격 서사가 타인의 불안을 즐기는 관음증적 욕구와 맞닿아있다는 것입니다.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타인을 훔쳐보는 관음증적 욕구에서 출발한 산물이라는 것은 알려진 정설이지만, 특히 추격영화는 절대악으로부터 쫓기며 불안해하는 이를 지켜보는 재미를 유발하지요. 추격영화는 아니지만 <엑시트>라는 영화는 독특한 장면을 제공하는데요. 재난의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을 사람들이 드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대목입니다. 주인공들에게는 생사가 달린 절박한 상황이 대중에게는 흥미로운 볼거리가 되어 버리지요. 영화는 이를 통해 현대인들의 관음증과 그것이 유통되는 사회현상을 예리하게 꼬집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타인의 불안 내지 불행을 관조하는 것을 책망합니다. 구약성경 오바댜는 에돔이라는 나라가 이웃 나라 유다의 패망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꾸짖으며 에돔에 대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이방 나라들이 유다를 공격해서 멸망시키자 유다의 형제 나라인 에돔은 이를 보고 즐거워하는데, 오바댜는 이 때문에 에돔이 심판받게 될 거라고 예언했던 것이지요. 바울 사도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고린도전서 13:6)이라고 역설합니다. 이는 불의함, 즉 악이 승리할 때 기뻐하려는 본능적 성향이 인간에게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타인의 불행을 보며 내심 즐거워하곤 하는데, ‘추격’ 서사는 바로 이 점을 애써 숨기지 않고 공유하며 유희의 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점에 대해 선한 권면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자 ‘멀찍이’ 예수님을 뒤따라 갑니다. 그리고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관망합니다(마태복음 26:58). 아마 삼 년간 모신 스승에 대한 걱정과 함께 결말에 대한 호기심도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사도로서의 삶은 예수님을 둘러싼 격변을 ‘지켜 보는’ 것이 아니라 산헤드린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예수를 변호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음을(사도행전 4장)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추격’ 서사의 단순함에 투영된 인간욕망
추격영화에서 서사는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단순하게 축약되곤 합니다. 이는 개연성의 부족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도 그러합니다. 쫓는 자의 목표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 또한 특출난 능력을 지닌 암살자입니다. 그를 추격하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요. 게다가 그와 연관된 사람들마저 처단해 나갑니다. 상당한 물적, 인적 자원이 필요한 일이기에 관객으로서는 ‘꼭 저렇게까지...?’라며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사냥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이십 대 청년들이 손쉽게 총기를 획득하고 무장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는 도박장을 급습해서 강도짓을 한다는 것은 개연성이 거의 없지만, 이는 추격의 서사를 전개하기 위한 감독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관객은 개연성의 미흡함을 지적하지만, 영화는 애당초 사건의 개연성을 관객에게 설득할 마음이 없었고 그저 추격이 주는 긴장과 대립을 즐길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이 영화들의 결말에서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공멸합니다. 앞서 <반도>를 지적한 것처럼, 무의미한 추격 끝에 쫓는 자가 얻는 것은 없어 보이며 단지 관객에게 유희가 제공될 뿐입니다. 서사는 흐릿하지만 영화의 목표는 뚜렷하다는 것이지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와 <사냥의 시간>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장면의 색이 서사의 흐름과 정확하게 조응함으로써 서사의 단순성에 일조한다는 것이지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일본 야쿠자가 등장하는 초반부의 화면은 검푸른색으로 채워져 몹시 차갑고 냉정한 느낌을 줍니다. 이후 액션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방콕의 장면들은 노란색 위주로 표현되어 살과 살이 부딪히는 끈적함을 느끼게끔 합니다. <사냥의 시간>의 초반부는 회색 내지 뿌연 황색조로 암울함을 더해주다가, 추격이 시작되자 화면은 비현실적일 정도의 붉은 색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듯 너무나 정직하게 내용과 조응하는 장면의 색은 일견 유치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데, 이는 마치 초등학생 시절 불조심 포스터에는 붉은색을 주로 사용했던 기억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화면의 색감을 바꿈으로써 마치 관객에게 ‘자 이제부터 액션 시작이야. 즐겨 봐!’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는 것이죠. 장면의 색감들은 서사의 단순함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뻔뻔’하다고 할 수도 있을 추격영화 서사의 단순함은 세상을 향한 영화의 ‘솔직한’ 태도를 반영하는데요. 영화가 그 사회의 정서를 반영함을 감안할 때, ‘추격’ 서사는 모든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면 비약일까요. 필자는 ‘추격’ 서사의 단순함과 직진성에는 자신의 욕망을 에둘러 숨기지 않은 채 그 욕망이 이끄는 대로 직진하려 하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이 투영되어 있다고 봅니다. 굳이 복잡하게 따지고 들지 말자는 것이 이들 영화의 태도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기독교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까요? 성경은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사사기 17:6) 사사 시대를 긍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허용하기보다는 억제하지요. 구약시대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을 저지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진술하면서(예레미야 6:15)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고 경고합니다. 염치는 위선이 아니라 인간을 짐승과 다르게끔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울 사도는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훈계했는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는 권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외에도 ‘추격’ 서사들은 기독교로 하여금 성찰해야 할 것들을 제공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관객은 무의식중에 쫓기는 자의 편을 들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또한 청부살인을 해 오던, 윤리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없는 자일 뿐입니다. 주인공들의 격돌은 마치 거악과 차악의 대립을 보는 것 같은데요. ‘어차피 선한 것은 없다’는 자포자기식의 체념이나 절대선 내지 절대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려는 그릇된 관념이 투영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이는 절대 진리인 복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곧잘 이어지곤 합니다. 추격의 끝이 허망함이라는 것도 문제일 수 있습니다. <악마를 보았다>(2010)에서 처절한 추격의 과정을 끝낸 주인공이 오열하는 모습은 지독한 허망함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예인데, 추격 서사가 허무를 보여주지만 오히려 영화의 목표는 시각적 유희임이 뚜렷하다는 것도 기독교로서는 살펴볼 일입니다. 해묵은 지적이긴 하지만, 등장인물을 매력 있게 그려내기 위해 과시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영상 기법을 동원하는 영화들을 향하여, 기독교는 ‘너희가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 또한 스스로를 포장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대중문화의 기법들을 따라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죠.
기독교의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이렇듯 최근 한국영화의 ‘추격’ 서사들은 우리가 숨 쉬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들 영화에 대한 분별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상업오락영화가 대중에게 소위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기대하는 것은 과욕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거나 내포하고 있는 세계관에 이끌려 기독교인의 신앙이 퇴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분별력 있게 섭취해야 하겠지요.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 하나. 이 영화의 제목은 기독교의 주기도문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본은 이제 현대인에게 오락거리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노재원 목사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