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목회 설교를 병행한 실천 신앙의 신학자
고봉은 일제하에서는 일본 동경에서 1930년-1944년 엘리트 목사로서 한인교회를 성공적으로 목회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국내에서 교회와 신자를 대상으로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도달한 상황이라 자신도 우상숭배에 대한 강요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곧 바로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양아버지 영재형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는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고봉은 고베에서 산호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를 개척하여 일본 교민들을 위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영재형 선교사와 함께 차별과 냉대를 받는 교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31세 나이로 고배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일본에서 소외받고 무시받으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던 교민들이 교회에 몰려 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의 압제 속에 있는 모국이 멀지 않아 하나님의 역사로 해방될 것이라고 기독교 신앙을 민족 신앙으로 설교하였다. 고봉의 개척교회에 신자들이 날로 늘어나고 지역에서 교회 평판이 좋았다. 그는 1939년 40세의 나이로 동경의 대형 한인교회인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의 청빙을 받아 새로운 목회환경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고봉은 신주쿠중앙교회에서 영감으로 준비된 설교와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청교도적 분위기로 교회를 이끌었다. 이 교회는 처음에는 작은 교회였으나 미국 유학갔다 온 신학박사가 목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몰려와서 일본 전역에서 한인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신주쿠중앙교회는 일본 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가 되었고 조선인 유학생만 2백명 모이는 조선인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었다. 이곳 동경신주쿠중앙교회 목회에서 고봉은 학문과 신앙이 역동적으로 결합된 목회적 전성기요 그의 생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안양대학교 50년사』, 안양대학교 출판부, 1998, 56). 그러나 이곳에서 일본에서의 목회 사역의 한계를 느낀다. 조국이 아닌 이국에서의 목회는 영원한 일자리가 아니고 일제에 압제당한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봉은 단지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 만을 돌본 것이 아니라 양아버지인 영재형 선교사와 함께 재일교포의 선교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재일동포를 위한 순회목사 자격으로 일본의 쓰시바 · 큐슈 · 훗카이도오 · 가라후도 등지의 교회들을 돌봤으며, 1939년 동경의 잇찌(一致)신학교 강사를 겸했다.
고봉은 동경 신주쿠중앙교회 목회에서 두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내선일치 명목으로 일본어로 설교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둘째는 고봉의 절대적인 인기를 질투하여 담임목사직을 강탈하려는 자들이 생긴 것이다.
조국 사랑을 강조하였던 고봉은 일본인들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어느 날 난데없이 들이닥친 일본 경찰들에 의하여 연행되어 신주쿠(新宿)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사상범으로 구속되어 그곳에서 수개월이 지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가 있었다. 이 일 후 고봉은 동경신주쿠중앙교회에서의 사역에 대한 커다란 회의와 실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고봉은 자기 자리를 탐내는 자들에게 교회를 양보하고 동경신숙중앙교회에 있으면서 개척하였던 메구로(目黑)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다음 해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령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 즉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다. 1942년 8월 솔로몬 군도가 미군에 의하여 공략된 후 전세(戰勢)가 일본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고봉은 해방의 날이 가까웠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는 1944년 3월 일본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는데 당시 그는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하자마자 당시에는 서울역 앞에 위치하여 한국의 관문이었던 남대문교회의 청빙을 받아 6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 교회에 부임한 뒤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1944년 당신의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었는데 고봉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서울에서는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회였다. 이처럼 열심 있는 기도와 은혜로운 설교로 인하여 남대문교회는 점점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마침내 남한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남대문교회에서의 그의 눈물 목회는 그를 한국의 예레미아 혹은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릴만큼 그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감동적으로 나타났다.(김치선 저, 최선 역, 『김치선 박사의 모세와 오경』(선교횃불, 2015), 297) 그는 신학자로서 목회사역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목회 설교를 병행하여 한평생 목회 사역에 동반되는 설교를 놓지 않았다. 그의 설교 특징은 18세기 영국 뉴잉글랜드의 개혁신앙의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통한 부흥, 성령의 비상한 역사를 통한 교회의 회개와 갱신, 성도의 삶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김명혁은 그가 고봉의 설교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있다: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김치선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던 창동교회(후에 대창교회로 개명)에 다녔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어디든지 쫓아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는데 서울의 감각산과 관악산은 물론 대구의 주암산까지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김명혁, “추천사: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12.).
8. 자유민주주의 사상
고봉이 전개한 3백만명 전도운동은 큰 진전을 보았는데 그에 의하여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를 비롯한 70여명 이상의 목사가 참여하는 3백만명 부흥전도회가 결성되었으며, 전국 2만 8천 동네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70여명의 목사가 선교목사로 전국에 파송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다. 복음은 반공 및 자유 사상으로 무장되어 파송 받은 선교목사들은 실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들은 공산 게릴라들의 잦은 출몰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지역까지도 거침없이 가서 전도를 하였다. 그러던 중 몇몇 전도자들은 공산 게릴라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사건은 공산당은 나라에 위협이 된다는 사상을 각인하였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한 김구(金九)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서 비서진들에게 한국 최고의 목사를 알아보라고 했는데 비서진은 남대문교회 김치선 목사를 추천했다. 이렇게 해서 김구 가족은 남대문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다. 김구는 고봉의 예레미아와 같은 눈물의 설교에 운혜를 받았다. 김구는 1주일에 한번 고봉을 경고장으로 초청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예배를 드렸다. 김구는 매일 남대문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고봉은 남대문교회에서 김구를 만나 민족복음화운동을 함에 있어서 해방 직후 이념의 대결이 심했던 시대에 명백하게 자유민주주의 로선을 택했다. 김구는 고봉에게 정치에 입문할 것을 종용했으나 자신은 목회자라고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한국은 1920년대 소련 볼세비키 혁명에 영향을 받은 이동휘 계열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침투되었다.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장악하고자 했으나 자유 민주주의 지도자 김구의 지도력에 의하여 제어되었다. 해방 이후 이들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지령을 받으면서 남한에 인민공화국을 세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고봉은 공산주의를 막는 일이 한국을 살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고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남한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복음과 아울러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하면서 민족복음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고봉은 통일 방식에 따른 김구와 이승만의 갈등에 의하여 어려움도 겪었다. 김구는 아들 김신(金信)의 결혼식 때에도 그 주례를 고봉에게 부탁하였다. 이러한 김구와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이승만 쪽에서는 언제나 고봉을 요주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를 감시하였다. 심지어 한 번은 형사들이 새벽 한 시에 고봉 집에 들이 닥쳐서 그를 인천구치소로 연행하였다가 풀어준 일도 있었다. 이처럼 조국의 광복과 그로 인한 정치적인 대립은 고봉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봉이 6.25 전쟁시 교인들을 피난시키지 않고 먼저 자신이 피난했다는 사실을 들어 그가 남대문교회 사임의 이유로 보고 비난하기도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봉이 먼저 피난한 것은 그가 투철한 반공사상과 이북출신으로 공산주의의 잔혹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엘리트 목사였기 때문에 공산당에게 잡히면 처형 대상 1호나 포섭 이용 대상 1호였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반공주의자들은 즉결로 처형했고 이용가치가 있는 자들은 사상전향을 미끼로 공산당 선전에 이용했다. 공산당이 1950년 6월 서울로 진군했을 때 친북 사상을 가진 한상기 장로는 고봉에게 기독교연맹 가입을 권유했다고 한다: “목사님 교회로 갑시다. 북에서 '기독교 연맹'이 내려왔는데 교회만은 자기들의 지배하에 예배 보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기별이 왔습니다. 목사님들을 해하지 않겠답니다. 그러니 도망 다니시지 말고 서울로 갑시다." 한상기 장로의 말에 대하여 김치선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됩니다. 내가 내려가면 반드시 잡히게되고, 기독교연맹에 가입하게 되니 그렇게 되면 나는 또 한 번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됩니다. 지금 비상시에 잡힐만한 사람들은, 때를 기다리고 숨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 동조하여 공산당이 될 수가 없습니다."(김의선, 고봉 김치선 목사의 생애, 金致善, 1899-1968, http://blog.daum.net/rfcdrfcd/15974672). 이에 대해서 한상기 장로는 다시 한 번 서울로 내려갈 것을 청했다: “목사님, 사태는 다 기울어졌습니다. 이제 한 주일만 지나면 적화통일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수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이제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어서 교회로 갑시다." 그러나 고봉의 태도는 강경했다: “아닙니다. 나는 끝가지 숨어 있다가 잡히면 순교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한상기 장로는 하는 수 없이 산을 내려갔다고 한다. 고봉은 공산주의의 실체와 기독교 연맹의 역할을 알고 있었고 그가 서울로 내려가서 기독교 연맹에 가입하였다면 그는 그의 말처럼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고봉은 몸을 피하여 무사히 전란(戰亂)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9. 회개를 강조한 개혁파 부흥 신앙 사상
고봉은 청교도 개혁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와 19세기 구학파를 좇아서 부흥운동을 추구하였다. 고봉의 신앙 사상에서 부흥 신앙이 중요하다. 그의 부흥운동은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역사를 인정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개 설교가 그 시대의 인본주의 사조에 맞서서 첫 번째 대각성운동(first great awakening movement)을 일으킨 것처럼 고봉 역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한 인간의 철저한 회개를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죄인이 회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인간 삶의 본질적인 변화, 성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제 신사참배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였다. 1952년 4월 18일 대구중앙교회에서 “전쟁 중의 부흥”에서 “오늘 여러분 나부터 더러운 일본 우상에게 절하던 자입니다.” 1961년 8월 6일 인천교회에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됨이로다“라는 설교에서 자신의 신사참배를 고백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아버지를 생각지 않고 미소가라바이에게 참배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나이까?...” 1962년 “고멜을 보라”라는 설교에서 신사참배 죄를 고백했다: “...나도 고멜과 같이 내 남편 주님을 버리고 일본 신사에 가서 그것들과 음행을 범하였습니다.”(김치선, “고멜을 보라,”(호 3장), 『김치선 박사의 설교모음집』(II), 211-212.)
고봉은 1952년 7월 10일 계성중학교 채플에서 행한 “한국의 장래”라는 설교에서 한국의 장래는 하나님이 주실 부흥운동이라고 하였다. 부흥운동이란 첫째 회개운동, 둘째, 기도, 셋째 하나님 말씀 순종, 넷째,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봉은 진정한 부흥이란 회개와 갱신을 통한 회복이라고 보았다. 고봉은 참된 부흥은 인간의 프로그램과 인간의 열심있는 기도와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참된 부흥은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땅 아래로 일방적으로 임하는 신령한 사건이다.
한국전쟁 후 고봉이 남대문교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창동교회를 개척했을 때 미국 소재 순복음교단은 한국에 교단을 창립하고자 열정적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고봉에게 접근하여 순복음 교단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고봉은 이를 거절하고 장로교 전통의 회개와 기도와 말씀 실천을 통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에서도 개혁신앙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고봉의 신앙 사상을 알 수 있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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