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모든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조금 후에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4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애굽에 머물렀다. 갈수록 상황은 악화되어 결국 애굽의 노예가 되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미완성 교향곡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애굽을 거대한 인큐베이터 혹은 영적 모판처럼 사용하시며 그의 뜻을 이어 가셨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소망으로 인내해야 한다.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다고 하셨다(히 6:19).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단절이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 일을 행하신다.
- 홍성건, <왕의 말씀>
“공동체생활을 하다 보면 죄를 짓는 자가 있다. 세상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음행 죄가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죄지은 사람을 징계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되면 죄의 전염성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번져나간다. 또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뭐라고 손가락질하겠는가? 죄지은 자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죄를 두려워하도록 경고해야 한다. 그러나 죄지은 자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그를 이해하고 용납하며 용서해야 한다. 이것도 교회가 가진 영적 파워이다. 처지를 바꾸어놓고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보라. 한결 세상이 편해질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이해(under+stand)이다. 모든 일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그러면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더라도 용서해주는 미덕을 가질 수 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없다. 용서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 김병태, <교회를 세우는 행복한 집사>
종교개혁자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여긴 것은 모든 권위를 초월하시는 하느님 한 분뿐이다. 예언자들은 불타는 덤불에서, 산 정상에서, 꿈에서, 한밤중에, 고난과 추방당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 절대적인 권위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도들은 제자의 길을 걸으라는 무명 떠돌이 랍비에게서 그 권위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스도교의 기나긴 역사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전통,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의회에서 결정한 신경들, 자신들이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이들의 합리적인 생각들, 성인과 신비주의자들의 신앙 체험, 지금 여기에 있는 교회의 사목 활동과 정신 등… 그리고 그중에서도 성서는, 특히 개신교 신자들에게 가장 커다란 권위를 갖는 요소다. 하지만 그조차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당신 사이에 더 영원한 관계를 맺으시기 전에 잠정적으로 이 성서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이 아무리 성서를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겼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교를 성서의 종교, 성서를 믿는 종교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 더글라스 존 홀, <그리스도교를 다시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