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5장 27-42절
언론사에 입사하면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가 있다고 한다. 기회주의자가 될 것인가? 소신을 지킬 것인가? 언론은 권력을 견제하고 불의를 고발하다 보니 하루에 몇 번이나 외압과 청탁을 받는다고 한다. 소위 ‘라인’을 잘 타면 부와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불의를 고발하고 진실을 밝히면 권력의 탄압을 벗어나기 힘들기도 하다. 여러분들이라면 기회와 소신 사이에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프랜시스 켈시’라는 약리학자가 있다. 그는 말단 공무원 시절 미국 FDA에서 신약 허가를 평가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러던 1960년 9월 ‘탈 리도마이드’라는 임산부 입덧방지제를 평가하게 된 일이 있었다. 효능이 좋아 유럽에는 이미 상용화되었고, 미국에서도 당연히 승인될 것이라고 제약회사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켈시’는 이 약이 동물과 사람에게 각각 다른 작용을 한다는 것을 보고 승인을 거부했다. 그러자 엄청난 이윤이 걸린 문제라 제약회사는 즉시 로비와 협박을 동원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소신을 굽이지 않았다. 결국 몇 년 뒤 이 약에서 기형아를 유발시키는 물질이 나왔고, 무고한 산모와 아이들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아울러 소신을 지킨 켈시는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강직한 공무원 표창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있다. 기회주의자가 될 것인가 소신주의자가 될 것인가?
본문의 시점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한 이후였다. 교회는 흥왕해져 갔고 구원받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기적도 일어나고, 복음을 전할 때 삼천 명, 오천 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자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은 대중의 인기로 이득을 취했었는데, 사도들 때문에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자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감금시켜 버렸다. 그러나 사람은 가둘지 모르나 복음을 가둘 수 없었다. 밤중에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었고 그들은 나와 다시 복음을 전하였다. 다급한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종교재판에 회부해 마녀사냥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담대하게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들추어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라”(30-31절) 진리 앞에서 종교지도자들은 ‘비겁’했지만 사도들은 ‘대담’했다. 사도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에게 굴종’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절) 여러분들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가? 지나치게 사람들을 의식거나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지 않는가? 모든 상황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길 바란다. 사람에게 굴종하는 자는 결국 바닥을 드러낼 것이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 주께서 높이 들어 쓰실 것이다. 결국 위기에 처한 사도들에게 하나님은 “가말리엘”을 통해 마녀사냥을 막아 주셨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어떻게 위협 속에도 소신을 지킬 수 있었나? 그들의 소신에는 행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절)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는 일을 ‘기뻐했다’의 원어는 ‘행복해 했다’라는 뜻이다. 예수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기에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고통을 잔을 기꺼이 마실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기쁨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더 큰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송가 458장을 기억할 것이다.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주가 위로해 주시리라. 아침 해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가라 참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 받네.”
성경에 수많은 인물들의 신앙 여정은 꽃길이 아니라 광야 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길에 행복이 있었다. 요셉은 임종 시에 자손들에게 자신의 뼈를 애굽 땅이 아닌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요청한다.(히11:22) 애굽의 영화보다 가나안에 거하는 것이 더 큰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모세를 말할 때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히11:26) 애굽의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더 큰 행복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선조들의 믿음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진리 앞에 비겁할 것인가 담대할 것인가? 세상에 굴종할 것인가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기회주의자가 될 것인가 소신을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인가? 믿음으로 소신을 지키시길 바란다. 믿음으로 결정한 일에 대해서 후회하지 말길 바란다. 박해와 핍박 속에도 행복으로 삶을 변화시키길 축복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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