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들은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드리지만 고침 받지 못한 분들도 있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어떤 분은 고침 받고 어떤 분은 고침 받지 못하는 이유를 단순히 믿음 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도 정죄감이기에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는 생각이 아니다. 다만 고쳐주시든지 아니든지 주권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인격적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아픈 아들과 딸을 고쳐달라고 기도하기를 기뻐하신다.
- 조태성, <코로나19 방패기도>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자이고 게다가 판결에 있어서 당사자들의 진정한 유죄나 무죄 여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재판관은 소송 당사자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것은 판결의 공정성이 법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 문제도 됨을 시사한다. 실용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정당한 절차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공의와 정의의 궁극적인 기준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내재하는 기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공평한 판단 능력이 한계에 달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호소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이것을 인정하고 그들이 하나님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을 명심하여 법적 절차를 진행해야 했다.
- 유진 메릴, < NAC 신명기>
죄인 된 인생을 심판하지 않고 오래 참으시며 긍휼을 베푼 사건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십자가가 아닌가? 하나님의 성품은 생명을 주는 것이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지, 산 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또 전능함은 준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주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빼앗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전능함은 잘못된 것을 바꿀 수 있고, 부족한 것을 채우실 수 있고, 굽은 것을 곧게 펼 수 있고, 죽은 것을 살릴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뜻한다. 하나님은 죽음을 이용하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에 처한 피조물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으로 자기의 선하신 의지를 따라 그를 살리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의 참소와 그의 권리 주장에 동의하지만, 욥의 생명에는 손을 대지 말 것을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것을 “네 손에 붙이노라”는 말씀은 인간과 세상의 권세에 대한 사탄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취지 못하게 하심은 하나님 자신이 생명인 까닭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지 취하시는 분이 아니다.
- 명노을, <욥기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