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오전 진행되는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 21일 모임에서 신한 전도사(계산교회 새터민 전도부)가 사마리아 여인 같았던 삶과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삶에 대해 간증했다.
신 전도사는 “함경북도 해령시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지원군으로 참전해 총탄에 맞아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이 아픈데 어릴 때는 철이 없어서 아버지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기도 했었다”고 했다.
이어 “군사복무 1년과 구두 공장에서의 짧은 사회생활 후 23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서 24살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젖을 먹여야 하는데 젖이 나오지 않아 쌀가루로 미음을 쒀서 먹이다 보니 아이들이 설사증이라고 하는 소화불량이 왔다. 큰 아이는 태어난 지 7개월, 작은 아이는 8개월 만에 떠나보내는 아픔을 겼었고, 저와 동갑이었던 24살의 남편은 희망과 포부가 꺾였고, 술김에 어머니를 죽이고 감옥에 가게 되는 집안이 불화에 불화였다”고 했다.
이어 “재혼하여 딸을 낳고 잘살아 보리라 맹세했지만, 일하기 싫어하는 남편을 만나서 삶이 죽을 맛이었다. 33살 12월 언니 집에 갔다 와서 설을 쇠려고 배낭을 짊어지고 나왔다. 대학생도 방학이고, 군대도 부대로 이동해서 명절을 쇠려는 때여서 사람이 기차에 붐비는 때였다. 기차가 서기도 전에 사람들이 밀고 밀치는 과정에서 제 몸이 돌고 돌아 기차 연결점에 들어가서 떨어졌는데 기차 레일 가운데 내 몸이 누워 있었다. 차 바퀴에 한쪽 팔이 끼여 역 앞 병원에 가서 수술하게 되었다. 딸 아이가 있으니 살고 싶었고, 수술대에 올라서도 의사 선생님에게 살고 싶다고 팔이 짧아도 좋으니 붙여달라고 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나 잘 알기에 장애를 가지기가 싫었다. 결국 팔을 자르긴 했지만 딸 아이를 바라보며 살아야겠다는 각오로 기쁘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남편의 요구로 이혼하게 되었고, 살다 지쳐서 딸 아이와 죽으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3일을 지냈다. 이렇게 아이를 죽이는 게 엄마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못된 짓 같아서 살기 위해 옥수수를 훔치다가 들켜서 빌고 빌어 얻어온 거로 죽을 쒀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했다.
신 전도사는 “딸 아이 12살에 탈북을 하게 되었다. 중국에 있는 외갓집에서 머슴 아닌 머슴처럼 살다가 우연히 아는 분을 만나서 남의 집에 팔려가게 되었다. 그분이 제가 장애인이니까 장애인이 아닌 사람을 만나기를 원했다. 저는 몸이 성한 어머니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던 모습을 보았기에 그렇게 살 수 없어서 장애인을 만났다. 가끔씩 북한에 두고 온 딸 애를 생각하면서 밤마다 울었다. 셋방에서 살면서 자꾸 우니까 주인집에서 싫어해서 일 년에 몇 번씩 이사를 하기도 했다”고 했다.
이어 “그러다가 주인집 아주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게 되었다. 남편과 있어 봐야 공허하고, 하소연할 곳도 없어서 마음 둘 곳을 찾아 간 곳이 교회였다. 평생에 잘한 일이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 자랑한다. 교회가 좋아서 지금까지도 하나님을 놓지 못하고 바라보고 산다. 갈급한 이 마음을 채울 길이 없어서 간 교회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살아계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 때마다 감사하고 그 은혜를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설교 때마다 목사님의 ‘두드려라 찾아라 부르짖어라 그러면 응답하여 주신다’는 말에 작정하고 기도제목을 써 놓고 기도했다. ‘북한에 두고 온 딸에게 소식이라도 전할 수 있게 해주세요, 두 장애인이 집이 없어 힘드니 집을 마련해 주세요,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있었다. 10년 넘게 소식이 없던 막내 여동생이 집을 사라고 돈을 주고, 먹고 살라고 상점을 해 주시고, 신랑이 지팡이를 짚고 북한에 가서 오빠를 만나고 오게 하셨다. 하나님 분명 살아계시면 분명히 내 눈에 보이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뿐인데,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내 눈앞에서 펼쳐질 줄 몰랐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일하시며 미숙한 자의 기도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이제는 주님을 따르고 주의 일을 해야겠다 마음먹고 주일성수와 새벽기도를 빼놓지 않고 다녔다.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 따르며 하나님 일 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했더니 잡혀가지 않게 지켜 주시고 장사하는 분들의 길을 맡겨주셨다”고 했다.
신 전도사는 “어려운 고비가 찾아왔었다. 마흔 살에 낮은 늦둥이 아들이 세 살 때 남편이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제가 남편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 좋은 사람인데 이렇게 갔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그분으로 인해 제가 대한민국에 오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일을 겪게 하시면서 대한민국까지 이끌어 오셨고, 기도를 들어주셔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인도해주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중국을 거쳐 태국으로 올 때 하나님께서 ‘놀라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이사야서 41:10절 말씀을 주셨다.10m 앞의 총구 앞에서도 눈을 가려주셨고 강을 건너게 하시고 태국까지 4~5시간 쪽배를 타고 오는데 착오 없이 목적지까지 인도하시고, 브로커들을 잘 만나서 태국의 수용소까지 무사히 올 수 있게 걸음걸음마다 임마누엘의 주님이 늘 함께하셨다. 콩나물시루처럼 탈북민이 빼곡히 들어찬 수용소인데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아들, 딸들이 있었고, 주일에는 예배드리라고 자리를 내주어서 찬양을 힘차게 부르고 말씀을 들으면서 열심히 주님을 믿었다”고 했다.
이어 “2008년 1월 11일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과도 같은 대한민국에 올 수 있었다. 국정원에 들어와서 북한 사람인 것이 확인되기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는 것이 의무였다. 아들이 “언제 이 방에서 나가서 아이들과 놀 수 있냐”고 물었다. 아들에게 “이곳에서 빨리 나가서 좋은 사람들과 같이 즐겁고 기쁜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고 했을 때, 아들은 눈물을 빗방울처럼 흘리며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빨리 이 방에서 구출해 달라고, 여기 있는 것이 싫다고, 아이들과 나가서 뛰어놀고 싶다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아들의 모습을 보며 나의 믿음이 아이보다 못 하구나를 돌아보게 하셨다”고 했다.
이어 “하나원을 거쳐 4월에 경남 밀양에 집을 받아서 나가게 되었다. 몸이 성치 못해서 청소할 때도 힘드니 작은 집을 달라는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했는데 놀랍게도 11평짜리 영세민 아파트를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대학원 1학년 학생을 만나게 해 주셨고 제가 사모가 되게 하시고 남편을 통해 많은 걸 배우고 성숙하게 하셨다. 한국에 와서 믿음의 모든 것이 깨어지고 학교도 가게 하시고 이런 사역의 테두리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가르쳐주셨기에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의 여종으로 맡겨진 일에 충성할 거 밖에 없다. 남편과 모든 것 극복해 나가면서 하나님 믿으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많은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개입해주셨고 함께 이뤄주신 것이 너무나 많았다”고 했다.
이어 “인천으로 이사 와서 계양구 계산교회로 가게 되었다. 나의 장애를 가지고 상처 주는 탈북민도 있었다. 집에서 대성통곡하면서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참게 하셨다. ‘너는 육신에 장애가 있지만 영적 장애가 더 무섭단다. 그들이 나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네가 기도해주면 안 되겠냐’라고 하시며, 나에게 상처 주는 그들을 비난하고 격분했을 때 기도가 부족했다는 걸 깨닫게 하셨다. 결국 힘들게 했던 분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세상에서 나를 만나면 너무 미안해한다. 그들은 세상에 살면서 믿음이 없고 나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하는 사람이기에 마음이 아련해서 미안해하지 말고 죄책을 가지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어디를 가든 하나님을 꼭 믿어라.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 모든 일을 하기에 하나님이 길을 막으시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다 보면 꼭 길을 열어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미워하지 않는다. 영혼구원 사역을 한다 하면서 영혼의 마음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면 안 되기에 상담목회대학을 나왔다.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던 제가 상담을 배우면서 아들에게 인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아가 모든 사람이 인격체라는 걸 알게 하셨다. 하나님 만드신 창조물인데 내가 함부로 할 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니 아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사과했다. 지금은 너무 대화가 잘 되고 있다”고 했다.
신 전도사는 “제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제가 학교를 졸업할 때 남편이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졌다. 7년이 되었는데 하나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남편이 하던 그 사역을 제가 도맡아 하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편이 쓰러졌기에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고, 낮은 자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하고자 했던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새터민을 위해서 작은 힘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이 자리에 서서 간증할 수가 있는 줄로 안다.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도 넓은 줄 안다. 북한에서 이곳까지 탈출해서 들어온 탈북민뿐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탈북민들이 한 제단에 엎드려 예배드리는 복음통일의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고 주님 맡겨주신 사명 가운데 충성해야 할 줄로 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