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종은 KBS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로 데뷔하자마자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대조영’ ‘장보고’ ‘왕건’ 등의 사극에 출연하여 ‘사극왕’이라고도 불렸다. 최수종은 쉽게 스타가 된 것 같지만 그에게도 몹시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청와대 고위 공무원이었던 최수종의 아버지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사업을 위해 파라과이로 먼저 떠나셨고 나중에 사업이 잘되어 가족들까지 모두 이민을 갔다. 당시 고1인 최수종과 고3인 누나만 한국에 남았다. 어머니는 파라과이와 한국을 왕복하며 자식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다. 그러다 누나는 조하문 목사와 결혼을 했고 최수종은 미국 콜로라도로 유학을 갔다. 인자한 아버지의 신앙 안에서 최수종의 가정은 평화로웠고 최수종의 책상 앞에 붙어있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는 성구처럼 모든 것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최수종의 집안에 엄청난 비운의 사건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고 사업실패를 겪으면서 그 아픔으로 60세에 돌아가신 것이다. 최수종은 콜로라도에 자신의 짐을 다 놓고 티켓비만 빌려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최수종은 어린 마음에 세상이 너무나 미웠고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수 있냐고 아버지를 한없이 원망했다. 하나님도 제일 많이 원망했다. ‘하나님, 그렇게 믿음과 사랑으로 지켜주시고 어려운 일도 되게 해주시고 저희 가정이 믿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밖에 없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이게 뭐냐’며 원망하며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집도 없고 오갈 데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고 안부를 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이 집 저 집 다니시며 마음의 병과 육신의 병을 얻으셨다. 80년도인데 밥 한 끼를 먹지 못했다. 잘 곳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잠을 잤다.
하루는 반포 고속버스터미널 벤치에서 잠을 자던 최수종에게 어떤 사람이 신문을 던졌다. “어이. 이거 덮고자. 새벽에 따뜻할 거야.” 그는 자신보다 허름하고 마른 사람이었다. 최수종은 그를 보고 무의식중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 같은데 어떻게 저에게 신문을 던져주는 거죠? 지금은 아니지만 제가 돈을 벌게 되면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최수종은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란 생각이 들어 다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며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파라과이에 혼자 남아 있는 동생에게 유학비를 보내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는 어머니를 위해 방 한 칸을 마련해보기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막노동 벽돌 나르기 등 많은 일을 했다. 얼마나 많은 벽돌을 날랐으면 그는 용산구청을 자신이 지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 건물을 세울 때 그가 그곳에서 벽돌을 날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고3 여학생 한 명에게 과외를 시켜줄 수 있냐는 부탁이 들어왔다. 그 아이 공부를 가르치고 학생 아버님과 대화하던 중 최수종의 사정을 들으시더니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 학생의 아버지가 KBS 방송국 예능국 국장이었던 것이다. 그분이 배우 한번 해보라고 제안을 했다. 최수종의 대답은 “그거 하면 돈 주나요?” 였다. 그런데 첫 드라마가 ‘사랑이 꽃피는 나무’였다. 그는 배우가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두 달 만에 청소년들이 자신이 지나가면 ‘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우리나라 대표 가는 청춘스타가 됐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최수종은 ‘사랑이 꽃피는 나무’라는 드라마로 데뷔하며 ‘청춘스타’가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드라마를 하면서 ‘젊음의 행진’ MC, ‘밤을 잊은 그대에게’ DJ도 하고, 영화도 찍으면서 가족들을 위해 정신없이 돈을 벌었다. 방 한 칸을 마련하고 외국에 있는 동생에게 보낼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렇게 해서 경기도 과천에 있는 주택가 지하 단칸 방을 겨우 마련했다. 구석구석에 비가 새서 곰팡이가 피어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어머니와 눈물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기자들이 최수종 집을 팬들을 동반하고 방문한다고 했다. 너무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보여주라고 하셔서 할 수 없이 그대로 보여줬다. 기자가 사진기자와 함께 팬 5명을 대동하고 왔는데 집을 보는 순간 기겁을 했다. 곰팡이로 인한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곳에서 엄마와 사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은 동생에게 400만 원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다. 기가 막혔다. 그런데 한 영화감독이 현찰 600만 원을 손에 들고 찾아와 영화 한 편 찍자고 했다. 최수종은 드라마와 디제이 등 너무 많은 일로 영화 찍을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딱 네 번만 나오고 나머지는 대역이 하는 영화라 가능했다고 한다. 최수종은 이런 일을 주신 것은 교회와 주위의 기도 덕분이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항상 좋은 일만 허락하시는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최수종은 한 음료 CF 광고를 찍고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그 광고가 교계가 이단으로 규정한 곳의 회사 제품이란 것을 알게 됐다. 최수종 어머니의 권유로 눈물을 머금고 그 금액을 모두 보육원에 기부했다. 최수종은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그 냄새 나는 집을 나갈 수 있었는데…
이후 그는 방글라데시, 네팔, 평양 등으로 봉사활동을 다녔고 국내에 학대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그리고 무의탁 독거노인들을 위해 봉사와 나눔 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면서 하희라 씨를 아내로 맞이하게 됐다.
하희라는 불교 신자였고 가위눌림이 심해 미신에 의지하고 있었다. 최수종은 하희라를 위해 15년을 기도했다. 그 와중에 하희라는 다섯 번의 유산을 겪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최수종의 기도는 고난을 이겨내게 했고 결국 하희라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 가정에 두 아이를 허락해주셨다. 두 아이를 갖게 된 최수종은 아이들에게도 존댓말을 하고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한다고 했다. 그는 아이와 매일 통화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대화한다며 웃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돌아가서 저와 좋은 시간 보냅시다.” 하니까 아들이 “아닙니다. 걱정 마십시오. 아빠가 없는 자리를 제가 책임지고 잘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첫째가 태어났을 때 최수종은 자신의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같은 병실에 다른 아이가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후부터 심장병에 걸린 어린이와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는 고칠 수 있는 병임에도 배고픔과 기아,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봉사활동을 가서 보았다. 평양을 방문해서도 약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할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시간을 쪼개서라도 봉사단체를 만나 후원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네팔에서 낮에는 채석장에서 돌을 깨는 노동을 하고 오후에는 학교에 가는 아이를 보면서 고맙고 미안해 눈물이 났다고 한다.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는데 아이들 스스로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모습들이, 그렇게라도 살려고 버텨주는 것이 정말 고마웠고 너무 미안했다고 한다. 이 아이들이 계속 학교에 갈 수만 있다면 또 계속 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지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마음이라며 우리의 작은 사랑의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키울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다며 간증을 마쳤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굿네이버스, 하트하트재단에서 활동하며 나눔과 봉사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최수종 씨가 지난 2012년 토론토 주사랑교회에서 간증한 영상의 내용을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