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스가랴 14장 1~11절
신앙생활에서 여러 풀리지 않는 질문 중의 하나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왔느냐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수년 동안 병이 치료되지 않고, 우울증세가 악화되고, 사업이 도산하고, 자녀들의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고통의 당사자가 타인이 아닌 자신이 될 때 절대 그 시련의 이유를 쉽게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2절에 보면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다. 본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시련의 용광로에 들어가게 하시고, 원수들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고통을 내버려 두신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들지 않겠는가?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고통 가운데 몰아넣으시나? 시련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 있다는 것인가?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의 명하심 없이 그냥 떨어지지 않듯 시련에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백성들을 향한 신앙순결에 있다. 신하는 임금에 충의를 다해야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의를 다해야 하듯 신부는 신랑에게 순결해야 한다. 성경은 교회를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신부로 비유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재림의 예수를 기다릴 때 의무는 끝까지 순결을 지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신앙순결을 지키는 자들을 통해서 일해 오셨다. 2절에 ‘성읍이 함락되고 가옥이 약탈되고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지만 그 불같은 시련 가운데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남은 자들은 신앙순결을 끝까지 지킨 자를 말한다.
여러분, 끝나지 않는 고통을 겪을 때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자고 일어나면 이방 나라의 손에 윤간을 당하고, 자고 일어나면 잡혀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얼마나 두렵고 도망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3절, 4절, 6절, 8절에 성경은 끊임없이 그날에 여호와가 날이 반드시 이른다고 약속하고 있다. 마 25장에 신랑의 기다리는 10처녀 비유에서 신랑이 더디 왔지만 마지막이 어떠했다고 말하고 있는가? 분명히 ‘신랑은 왔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순수신앙을 시험하시곤 하신다. 욥처럼 때로는 네가 모든 것을 빼앗겨도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는 고통에도 하나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거대한 세상 신 앞에서 두 주인을 섬기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길 수 있는가? 그러나 기억하여라. 여호와를 향한 순결신앙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을 때 반드시 어떤 약속을 하셨나? 11절 읽겠다.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다시는 저주가 없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수신앙을 통해 마지막에 웃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1892년 낯선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 부부가 있었다. 자녀가 없어서 고민하는 그들에게 6년 만에 첫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 후 8개월에 하나님이 하늘나라로 데려가셨다. 부부는 이들의 시신을 양화진에 묻었다. 3년이 지나 아픔이 아물어 갈 때쯤 둘째 아이가 생겼다. 열 달을 품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루 만에 그를 하늘나라로 데려가셨다. 그리고 1년 뒤 어머니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이 모든 일을 지켜봤던 조선인들이 선교사 부부에게 물었다. 당신이 전하는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요? 그 물음에 선교사는 대답 대신 찬양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이 선교사가 연동교회의 시초와 경신학교의 교장이었던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였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 가운데 있는가?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길 바란다. 평강의 날이 곧 이를 것이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