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올해 6·25 70주년을 맞아 최근 서울신학대학교를 정년퇴임한 박명수 교수(한국교회사)의 논문 ‘거시적인 측면에서 본 6·25 전쟁과 한국사회’를 연재했습니다. 이번이 그 마지막 순서입니다.
III. 6·25 전쟁이 남겨 놓은 과제: 한반도의 통일
1. 한반도의 분단 과정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만들어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한반도에 미, 소, 영, 중 네 나라의 신탁통치를 실시하여 어느 한 세력도 한반도를 독점하지 못하게 하여 힘의 균형을 이루고, 이런 가운데서 미국은 영국과 중국의 도움을 얻어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으며, 궁극적으로는 한반도를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편입시키려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둘로 나누려고 생각하지 않았고, 공동으로 신탁통치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인해서 소련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급히 38선을 만들었고, 미군은 남한에만 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이 한반도를 영구 분단시키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일본의 항복직후에 미소가 합하여 하나의 중앙집권적 행정부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런 미군의 제안은 소련에 의해서 거부되었고, 결국 이 문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회부되었다. 미국은 먼저 38선을 철폐하고, 그 다음에 임시정부를 설치하여 신탁통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것을 거부하고, 먼저 정부를 만들고, 그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정부는 인민정부를 말한다.
미국은 원래 소련과의 협력을 전제로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생각하였고, 이것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미국의 자본주의 세력을 극복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생각하는 소련이 미국에 협조하지 않자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가지고 갔다. 그래서 1947년 11월에 열린 제 3차 유엔총회에서 유엔의 감시 하에 한반도의 총선을 실시하여 독립되고, 통일된 중앙정부를 세울 것을 결의하였다. 물론 소련은 이같은 미국주도의 결정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련은 북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남한에만 선거가 실시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고,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남한도, 북한도 자신들의 정부가 한반도의 반절만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오래 동안 하나의 공동체였기 때문에 38선을 중심으로 남북의 분단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남한은 먼저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만들고, 이것을 근거로 북진하여 자유통일을 달성하려 하였고, 북한은 먼저 북한에 민주기지, 즉 공산정권을 만들어 남한까지 국토완정을 하려고 하였다. 원칙적으로 이 두 세력이 다 같이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전쟁의 가능성을 간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북한이었다. 김일성은 일찍이 소련의 도움으로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실질적으로 소련제 탱크의 도움을 받아 무장하였다. 여기에 남한에서 북으로 넘어간 박헌영은 남한에는 남로당이 건재하고 있어서 소위 민족해방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들이 합세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북한의 움직임을 무시했다.
여기에 비해서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 실제로 진행되어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여 한국군에게 무기를 제공하지 않은 채 철수하였고, 소수의 군사고문단만 남겨 두었다. 남한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45년 6월 25일 북한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서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은 즉각 이 문제를 유엔에 보고하였고,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이 전쟁을 북한이 남침한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이어서 유엔회원국에 이 침략전쟁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유엔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미국 단독으로 진행하기 보다는 유엔의 이름으로 전쟁을 수행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첫째로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아도 되었고, 둘째로 전쟁을 유엔 대 공산주의의 구도로 몰고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미국은 왜 이렇게 빨리 전쟁에 개입했을까? 트루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미국은 중국을 공산주의에 넘겨 준 다음에 국내에서 트루만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이제 중국 다음에 한국이 넘어가면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상은 흔들리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미국이 공산주의의 침략을 묵과하면 소련에게 미국이 한 없이 양보한다는 잘못된 사인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루만은 여기에서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것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거대한 국제정치의 흐름 가운데서 이승만은 이 전쟁을 어떻게 끌고 가려고 했는가? 이승만은 1945년 8월 한반도에 38선이라는 군사적전선이 설정될 때부터 이런 경계선은 필연적으로 한반도에 내전을 가져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미, 소, 영, 중 각국의 정상들에게 전보를 보내 “통합된 독립민주한국”(A United Independent Democratic Korea)을 만들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해방 직후 그가 외쳤던 것은 신탁통치의 반대(독립)와 38선의 철폐(통일)였다. 하지만 소련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한에 인민정부를 세우고, 토지혁명을 실시하고,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선 통일, 후 정부 수립의 입장에서,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의 입장으로 자신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북한이 먼저 정부를 수립한 마당에 남한에 민주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한반도의 공산화는 불 보듯 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승만의 요구를 결국은 미국도 받아 들였다. 그래서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고, 결국은 남한에 민주정부를 세우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유엔과 미국, 그리고 이승만이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1947년 11월 유엔이 결의한 것은 남북을 포함하는 중앙정부였고,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가 남한 만의 총선거를 결의한 것은 한반도 전체의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전 단계였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정부수립 후 유엔과 한반도의 가장 큰 과제는 북한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는 것이다.
6·25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트루만의 기본 입장은 공산주의의 공격을 저지하여 38선을 원상으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입장은 달랐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1947년 유엔총회의 결의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현상유지를,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원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북한군의 패배가 기정사실화되었을 때, 이런 승리의 분위기 가운데서 유엔과 미국은 전쟁의 목표를 수정하여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것을 허락하였다. 여기에 이승만은 적극적으로 동의하였다. 이제 자유 통일이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엔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의지는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그것은 중공군의 개입이었다. 미군이 38선을 돌파하자 모택동은 원래의 약속대로 한반도에 개입하였고, 이제 중공군은 전쟁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가 되었다. 이제 중소는 같은 공산불럭으로서 강력한 동맹이 되었고, 미중은 이제 적대국으로 전락된 것이다. 스탈린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중공군의 개입으로 자유통일의 꿈은 사라지게 되었고, 다시금 미국과 유엔은 현상유지 정책으로 돌아갔다. 미국과 소련은 다같이 이 전쟁이 3차 대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대신 자신의 진영이 내부적으로 공고화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의 진영을 공고화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단지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이 전쟁은 상처만 더욱 깊게 만든 결과만을 가져왔다.
2. 6·25 전쟁과 한반도의 통일
6·25 전쟁은 냉전 초기에 있었던 국제정치의 산물이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체재가 좋은지를 알지 못했다. 비록 다수의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 월남했지만 수수의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승리를 확실히 믿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산혁명의 성공은 과학적인 진실이라고 믿었다.
선택은 결과를 낳는다. 개항 직후 쇄국의 선택이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다면, 6·25를 통한 두 체재의 확립은 과연 어떤 체재가 더 나은 체재였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사실 한반도는 냉전시대에 어느 쪽이 더 나은 체재인가를 경쟁하는 경쟁 장소였다. 남과 북, 그리고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은 한반도에서 체재경쟁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소위 88올림픽을 통해서 나타났다. 한국은 이제 비로소 87체재로 불리는 민주화 도입의 시점이었지만 올림픽에 참가한 많은 외국인들, 특히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은 어떤 체재가 나은 체재인가를 똑똑히 보게 되었고, 이것은 동유럽사회주의의 몰락을 가져왔다. 결국 결론은 이미 난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체재는 인위적으로 그 수명을 연장해 가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말에 시작된 공산권의 붕괴는 20세기 역사의 중요한 지점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종식되고, 자유세계가 승리했다는 축제는 없었다. 특별히 한반도에서 이런 역사적인 변화에 대한 세계사적인, 철학적인 깊은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남한의 독재정권과의 민주화 투쟁이 한 참이었고, 이런 세력들은 남한의 독재정부와 싸우다가 오히려 북한의 종북세력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들은 공산권의 붕괴를 가슴아파하였고, 대한민국의 승리를 애써 감추려 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 민주화 운동과 종북운동은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었고, 냉전의 종식과 자유세계의 승리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2020년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1950년대의 한국인들 보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시작된 냉전시대는 1980년대 말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역사는 개인의 권리와 소유권을 무시한 공산주의 체재 보다는 개인의 인권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체재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더 좋은 제도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도 문제가 있지만 이것은 수정 보완해야 하는 것이지 폐기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올해는 6·25 전쟁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70주년 전에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그러나 이제 공산주의는 패배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드러났다. 많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이제 민주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구소련과 동유럽처럼 사회주의를 완전히 포기한 나라도 있고, 중국처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시에 추구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는 중국이 보다 개방되고, 민주화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시아에 다시는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는 행동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우리가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북한이다. 우리는 북한에도 시장이 형성되고, 자본주의의 물결이 들어가고 있다고 듣고 있다. 하지만 현재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이고, 개인의 인권이 무시당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런 북한의 존재는 남한체재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또한 우리는 북한 동포들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본다.
이승만은 비록 6·25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지만 이것을 통해서 북한의 동포들을 자유롭게 만들고, 한반도를 자유 통일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이승만의 꿈은 현재에도 대한민국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적인 기본질서에 기초한 남북한의 평화 통일이다. 우리 남한은 무력으로 한반도가 통일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6·25와 같이 자의든, 타의든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북한의 우리 동포들이 자유를 맛보고, 한반도 전체가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6·25 전쟁이 자유대한민국에게 부과한 과제이다.
맺는 말: 6·25 전쟁과 오늘의 한국사회
오늘의 대한민국은 아직도 6·25전쟁이 만들어 놓은 구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휴전선은 여전히 튼튼하고, 남북에는 체재가 다른 두 국가가 존재하며, 이것은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와 종교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사회는 6·25 전쟁과 연속성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지금 우리는 그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는 붕괴되고, 냉전은 종식되었다는 것이다. 과거 냉전체재가 끝났고, 이제 사회주의는 그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과제를 제시한다. 첫째는 한반도는 언젠가는 자유민주적인 질서 위에서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1948년 유엔은 한반도가 총선거를 통하여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될 것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이런 결의는 소련의 북한총선거 거부로 이어져서 실행되지 못했다. 오히려 6·25 전쟁으로 인해서 이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공산주의가 실패로 끝나고, 자유가 온 세계에 퍼지고 있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유민주적인 질서에 기초한 통일에 대한 꿈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대륙에 이런 자유민주적인 질서가 확장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한반도 주변에는 이런 자유민주주의적인 국제질서를 외면하고, 여전히 사회주의 체재를 유지하려고 하는 세력이 있다. 한반도는 오래 동안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런데 중국은 어느 정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시장경제를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아직도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와 손을 잡고, 중국이 우리와 함께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이웃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오래 동안 한반도는 아시아의 교차로에 서 있어 왔다. 과거에 한반도는 수동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국가가 되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자유세계와 손을 잡고, 아시아 대륙, 특히 중국대륙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과거 6·25 전쟁시에 중공군은 우리의 자유를 위협했지만 이제 우리는 중국의 민주화에 기여해서 다같이 아시아 대륙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끝)
박명수(서울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