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이란 용어는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저서 ‘판단력 비판’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독일어 Welt(세계)와 Anschauung(관점)을 조합한 Weltanschauung이라는 신조어다. 칸트의 명성과 그를 열심히 인용한 헤겔에 힘입어 19세기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 모르면 안 될 상투어가 될 정도로 유행하였다. 이것이 영국과 미국으로 전파되어, worldview로 번역되었고, 그 개념이 동아시아에 전달되면서 世界觀, 즉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정착되었다.
이제는 우리들의 귀에도 낯설지 않은 세계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철학인가 혹은 신학인가 아니면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인가? 세계관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논리 정연한 이론적 철학도 아니고, 잘 설명되고 조직된 신학은 더더구나 아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선택을 좌우하는 기준으로 각자의 일상에 매순간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너무 가까이 있어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그러면 “세계관이란 용어를 들어본 적도 없는 내가 어떻게 세계관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우리는 윤리학에 대해 잘 모르지만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산다. 정치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도 정치가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다는 견해는 가지고 있다. 경제학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자신의 소견에 따라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계관은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을 통해 차곡차곡 형성되는 것이다. 훌륭한 학자가 정립해 놓은 것을 자신의 것으로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세계관을 깨닫는 것은 자기 인식과 자기 이해로 나가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또 자신이 대하고 있는 사람의 세계관을 아는 것이 상대방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제임스 사이어의 “The Universe Next Door/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이라는 책에서는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세계관이란 이야기이며 실재의 근본 구성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련의 전제들의 집합이다. 이 전제들은 자신이 의식하는 것이거나 무의식적일 수 있고 일관적이거나 비일관적일 수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옳거나 혹은 완전히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즉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큰 고민 없이 형성된 세계관은 편견 혹은 선입견의 집합일 가능성이 높다. 일관성도 없고, 완전히 잘못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편견들의 집합이 우리의 세계관 일수 있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 19처럼, 재채기 하듯 내뱉은 다른 사람의 견해에 감염되어 그것이 나의 견해가 된다. 또 악수하면서 그 사람의 손에 묻은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나 자신도 그 오염원이 되고, 끊임없이 떠들어 대는 선전에 세뇌되어 나도 모르게 그 선전 문구를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 정립에 너무 적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의 선전과 선동에 쉽게 휩쓸린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과 기도로 늘 깨어있어 자신의 세계관을 살펴보아 정결하게하고, 경각심을 가지고 그 정립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세계관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기독교 세계관을 살펴보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건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한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는 베냐민 지파 유대인으로 위대한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골수 바리새파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세계관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 무리들이란 신성을 모독하는, 돌로 쳐 죽일 죄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앞에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었던 예수가 빛 가운데 나타나 눈이 멀었고, 그가 보낸 아나니아의 안수에 의해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서 다시 보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된 그의 세계관이 변화되었고 즉시 그가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바울은 기존의 세계관 위에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속성으로 세운 세계관이 혼재하는 시기를 보낸다. 그러나 이전 세계관을 다 허물어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계관을 제대로 세워 이방의 선교사로 거듭나기까지 아라비아에서 3년, 고향인 다소에서 그보다 더 긴 숙성의 기간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거듭남을 체험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안에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세상의 모든 이론을 전부 허물어뜨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반석, 그분을 계시하는 성경의 반석 위에 우리가 그동안 세상에서 알고 배웠던 지식을 다시 해석하고 바로 세우는 작업을 반드시 해야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남의 기쁨 속에 기존의 세계관은 그대로 둔 채 급하게 그 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우게 된다. 이럴 경우 내가 경험했던 것처럼 교회와 세상의 이중적 잣대 위에서 줄타기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세상의 방식을 따라 탈법과 편법을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한 가르침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고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재해석해야 한다. 물론 현실 속 우리의 선택도 그 기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영국 성공회 선교사였던 레슬리 뉴비긴 주교는 “성경은 바라볼 책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세상을 봐야하는 책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성경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직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그분”을 기준으로 한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이요 성경적 세계관이다.
묵상: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거듭난 후 자신의 세계관을 새롭게 정비한 적이 있는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BK21플러스 치의학생명과학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