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10분에 진행되는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 16일 모임에선 김주한 목사(탈북민, 다윗의 물맷돌 선교회 대표)가 북한선교에 보여주신 비전에 대해 간증했다.
김 목사는 “함경남도 어느 지역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인민학교,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뒤 91년에 북한 인민군에 입대했다. 소금도 없어서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열악한 군 생활이었는데, 4년 정도 복무하다가 몸에 장애를 입고 94년에 의가사제대를 했다. 90년 초반부터는 북한 경제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늘은 앞집 사람이 내일은 뒷집 사람이 죽어 나가도 우리 동네만 못 살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식량을 구하러 돌아다니면서 전국의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기 위해 훔쳐 먹고 사기도 치면서 살다가 마지막으로 식량구입을 위해 떠난 걸음이 탈북의 걸음이 되었다”고 했다.
이어 “전국을 돌아다녀도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맏형과 함께 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먹지 못하고 영양실조가 온 상태여서 거센 물살에 둥둥 떠내려가는 걸 형이 머리채를 잡아 건져냈다. 실제 도강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 탈북자들이 있다. 강에서 나와 무작정 불 켜진 집을 두드리니까 북한에서 왔구나 생각하고 두말 않고 들어오라 해서 불을 때서 밥을 차려주셨고 그때부터 배고픔의 고생은 끝났다”고 했다.
그는 “북한에서의 고생은 끝나고 중국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는데, 마음 가운데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다. 중국에 와서 처음 느낀 것은 사람은 의지할 지팡이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중국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고 삶의 기반이 없는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고향에서 형제·부모라는 터전 가운데 살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삶의 터전이 사라져 버리니까 무엇을 의지해서 살아갈까 하는 두려움과 질문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은 내가 잡고 있던 삶의 터전, 의지의 지팡이가 하나, 둘 부러지고 마지막까지 붙들 던 게 무너졌을 때였다. 중국에서 처음 삶의 지팡이로 잡고 일어섰던 것은 함께 온 형님이었다. 말도 모르고 인간관계도 없고 터전도 없지만 형이 있기에 아무리 내 삶이 어렵고 힘들다 해도 형과 함께 다시 또 일어나서 막막한 세상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체포됐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형이 내 삶의 유일한 희망이고 삶의 지팡이였는데 그 지팡이를 놓쳐버린 것”이라며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모르니 그때부터 중국 땅에서 방황의 삶이 시작되었고 그 상황을 잊어버리기 위해 술에 찌들어 살았다”고 했다.
이어 “그러면서도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찾은 두 번째 삶의 지팡이는 세상 사람들의 양심, 인심이었다. 일해 주고 섬겨주면 최소한 재워 주고 먹여줘서 내 삶이 유지되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했다. 닥치는대로 일하다가 군 생활에서 얻었던 병이 다시 도졌고 너무 힘들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내 모습이 저주받은 인생 같아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원망하며 살았다. 아프다고 하면 직장에서 쫓겨날까 봐 아픈 걸 숨기고 지팡이를 짚고 한쪽 발로 뛰어다니면서 일했다. 병원에도 갈 수 없어서 약국에서 페니실린과 주사기를 사서 무릎에 주사약을 투여하고 너무 아파서 바닥을 뒹굴뒹굴 굴렀다. 밤에는 옆 사람에게 피해가 갈까 봐 아파도 신음도 못 내고 견뎠다”고 했다.
김 목사는 “같이 지내던 탈북자 형의 권유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가게 되었다. 목단강 근처에 있는 조선족 교회였는데 앞에는 할머니 몇 분이 앉아서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제일 뒤에 앉자마자 눈물이 확 쏟아졌다. 인생이 서러워서인지 원망스러워서인지 교회 나가면 뒷자리에서 울다가 갔다. 하루는 전도사님들, 여집사님들이 나를 가운데 앉혀놓고 이 형제가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주셨다. 어려운 때일수록 하나님의 사람과 같이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는 기도는 이루어주신다”며 “그 기도대로 오늘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병이 나아진 것도 삶의 길이 열린 것도 아니었다. 몸은 밥을 못 먹을 정도로 더 아파졌고, 몸에서는 계속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다 집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죽는다는 생각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한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을 찾아 북경으로 가려 했다. 3월 초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다니던 교회에서 겨우겨우 차비를 마련해서 지팡이 하나 짚고 할머니들과 함께 불렀던 찬송가만 주머니에 챙겨서 차표를 샀다. 아무리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아 역전 매점에 가서 물어보니 내가 타야 하는 곳이 아닌 다른 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정신없이 뛰어가서 마지막 힘을 다해 닫힌 문을 두드렸는데 차는 이미 떠났다고 다른 차를 타라고 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다가 이전에 여관에서 함께 일했던 조선족 형님을 우연히 만나 다음날 차표로 바꿀 수 있었다. 정말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는데, 구원이란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주는 것이란 걸 그때 철저하게 느꼈다. 다음날 차를 기다리는데 어둠이 확 몰려왔다. 사람이 소망이 없고 절망이 없으면 대낮인데도 새카만 밤처럼 느껴진다. 그 캄캄한 가운데서 마음 속으로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질문했다. 내가 돌아갈 곳은 부모·형제들이 있는 고향인데 점점 더 멀리 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다가 영원히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암울함과 이 작은 역에서도 길을 헤매는데 북경에서 한국인 병원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앞이 새까매졌다. 그때 내 앞으로 중년 남성이 한글이 쓰여진 가방을 들고 지나갔다. 한국어, 한글 간판을 보기 어려운 곳인데 ‘항상 기뻐하라’는 한글이 적혀 있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상황인데 기뻐하라는 말에 ‘어떤 신이 나를 돕는구나!’ 마음에 힘을 얻고 북경행 열차를 탔다”고 했다.
김 목사는 “북경에서 내가 붙든 마지막 지팡이는 주머니에 든 중국 돈 오십 원이었다. 오십 원으로 일주일을 버티며 한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을 찾으려 했다. 아무도 병원의 위치를 아는 곳이 없었고, 대사관, 교회에 도움을 청하러 갔지만 중국 공안들이 총을 차고 지키고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아침에 북경에 내렸는데 새카만 밤이 되고 살을 에는 추위에 일주일을 버틸 돈도 택시를 타느라 다 떨어져서 더는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무릎에선 염증이 툭 터져서 고름이 쏟아져 나와 바지 아래와 신발까지 다 적셨다.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나갔었다. 미친 사람처럼 엉엉 울면서 지팡이를 짚고 길바닥을 헤매며 돌아다녔다”고 했다.
이어 “어느 담장 밑에 무릎을 꿇고 찬송가를 펼쳐서 불렀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늘에 기도했다. 그동안 교회를 도움받기 위해서 다녔는데 더는 앞으로 갈 길도 뒤로 돌아갈 길도 없으니 무릎을 꿇고 하늘에 대고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 살고 싶습니다. 제 나이 이제 25살입니다. 살고 싶습니다’ 기도했다.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작은 몸 하나 누일 자리가 없다며 세상을 원망하고 죽어가고 있었고, 내일의 떠오르는 태양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떠오르는 태양을 다시 봤다. 자녀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신음 하나조차도 놓치지 않는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들으셨고 사람을 만나게 하셨고 삶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주님의 교회를 만났고 한국 최고 외과 의사들을 만나 다리 수술을 받았다. 그때부터 교회 지붕 밑을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때 내 마음 가운데 간절한 질문 하나가 있었다. 북경에서,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깨닫고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서 느낀 것이다. 죽음 같은 상황에서 살아났지만 다시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이 삶의 이유를 알지 못 한채 다시 그런 어둠과 고통을 만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때부터 진리에 대해 갈급함,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교회, 불교, 천주교 다 가 보았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사람들 앞에서 이미 지옥을 살아봤다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천주교에선 예수라는 사람이 과연 무엇이길래 소중한 결혼도 포기하고 예수라는 사람을 섬기는가 물었다. 불교의 두꺼운 경전을 밤새 읽었는데 불교는 죽음을 윤회로 풀었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순간은 다음 생에 벼룩으로라도 태어날 수 있을 거란 소망도 없었기에 이 도에 나를 맡길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진리에 갈급할 때 하나님께서 지하신학교로 인도해주셨다”고 했다.
이어 “지하신학교 가운데 3년 반 동안 성경을 100번 이상 읽고 금식도 밥 먹듯이 하고 하루에 기도를 3~4시간 했는데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믿어지지 않았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나와 무슨 상관있는가 하는 생각에 부대꼈고, 성경은 멋있는 거짓말 같았다. 믿어야 살 것 같은데 믿어지지 않아서 벽에 머리를 찧으면서 믿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다”고 했다.
이어 “에베소서 2:8에 ‘믿음은 너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시는 선물’이라는 말처럼 어느 날 성령으로 갑자기 믿어주는 역사를 부어 주셔서 창세기 1장 1절부터 계시록 마지막 구절까지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믿어졌다. 하나님이 이 땅과 인간을 지으셨고, 인간이 죄를 지으므로 버림을 받았을 때 주님이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사실이 믿어지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 땅에 태어나서 작은 몸 하나 둘 곳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을 때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을 만난 것이다. 그분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떨었지만 죽음의 권세를 깨신 하나님이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남은 삶을 주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내 남은 삶은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러브스토리만 남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만난 자에게 주님의 일을 주셨다”며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소망이 북한 땅에 있고 세상은 북한을 비천한 나라로 보지만 하나님은 그 땅의 영혼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북한에서 고통당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북한 땅에 묶여 있는 자들, 병에 걸린 자들, 모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치유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통일선교를 해 나가는 게 십자가의 길이라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다.
아울러 “지난 기간 한국의 큰 교회들 밑에서 북한 부서 사역을 했었는데, 교회 시스템만으로는 탈북민 영혼을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윗의 물맷돌 선교회를 만들어서 탈북민 영적 대부흥 운동의 역사를 세워가고 있다. 탈북민을 영적으로 깨우는 운동을 하고자 8월에 탈북민 통일 캠프를 계획 중이다. 한국교회가 탈북민을 수용하고 북한 사회를 품어내는데 영적인 힘이 없다. 남북통합 영성집회를 통해 한국교회를 깨우는 운동을 주님 앞에서 비전을 가지고 일으키고 있다”며 “다양한 탈북민 목회자들과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간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