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트루스포럼’의 연구위원인 조평세 박사(북한학)가 본지에 ‘기독교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를 매주 한 차례 연재합니다.
요즘 국내 곳곳에서 보수주의를 공부하는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다. 특히 보수주의의 본질이 비교적 쉽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복음주의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꽤 활발하다. 필자도 얼마 전 2, 30대 기독청년 10명이 모여 ‘기독교 보수주의’라는 주제로 스터디를 하는 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참가자 모두 러셀 커크의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지식노마드, 2019)를 읽고 오면, 발제자가 보수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주제발표를 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형식이었다.
나는 강의준비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 역사와 양심’이라는 ‘일반계시’ 외에 성경이라는 ‘특별계시’를 가까이 접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이라면, 이미 보수주의의 가치를 깊이 내면화하고 있지 않을까? 보수주의, 특히 유대기독교 가치관을 표명하는 ‘기독교 보수주의’는 그 모든 입장과 정신이 모두 성경에 깊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터디모임을 반나절 앞두고 채팅방을 통해 스터디원들에게 급히 숙제를 내주었다. 각자 성경에서 보수의 정신을 가장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본문을 하나씩 찾아와서 나누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성경 자체가 유대기독교 가치관, 즉 보수의 정신을 두루 담고 있기 때문에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설명을 통해 보수주의를 공부하는 것 보다, 각자가 성경을 통해 스스로 ‘알아차린’ 보수의 정신을 나누어 준다면 훨씬 더 풍성한 나눔이 될 것 같았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직접 풀어주신 ‘보수의 정신’은 그 어떤 강연이나 보수주의 책들보다 강력했고 호소력이 있었다. 이곳 지면을 통해 공유해본다.
스터디원 중 두 명은 보수주의의 핵심 전제인 ‘창조질서’에 주목하고 창세기 1장에서 두 구절을 뽑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7).” 창조주를 인정하는 것과 사람이 창조주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보수주의의 가장 기초 전제다. 특히 두 번째 구절은 인간 존엄의 근거가 되며 모든 인간사회 질서의 기준이 된다. 미국의 저명한 보수주의 평론가인 벤 샤피로(Ben Shapiro)는 최근 국내에 번역된 그의 역작 <역사의 오른편 옳은편>(기파랑, 2020)에서, 인류 역사 3,500년의 회고를 통해 ‘자유’라는 현대문명의 기원이 이 창세기 구절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친구는 로마서 3장 10절부터 12절을 골랐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바로 보수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신념이자 기독교의 핵심교리 중 하나인 ‘인간의 한계(혹은 타락)’에 주목한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인류의 경험적 역사의 관찰과 괴로운 내적 성찰을 통해 이 결론에 도달하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 진리를 성경말씀을 통해 이미 납득하고 있다.
나는 신명기 32장 7절을 골랐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나는 보수의 정신이 결국 인류 역사의 경험을 존중함에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 구절의 문맥처럼, 정치적 해방(freedom)이 처음 구현된 히브리인들의 출애굽과, 하나님의 법도를 통해 정치적 자유(liberty)가 처음 구현된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을 기억하는 것 말이다.
보수주의의 가장 기초적 태도라고 할 수 있는 “옛날을 기억하라”는 말씀과 같은 연장선에서, 말라기 4장도 나왔다. “....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법도를 기억하라는 명령은 사실 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심 메시지다. 그리고 400년의 침묵기를 앞두고 성경은 창조주(아버지)와 인간(자녀) 간 관계의 회복을 약속하신다.
또 한 자매는 디도서 2장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와 종들과 상전 등의 각기 다른 역할과 본분에서 비롯되는 권위와 질서에 주목했다. “...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원수는 언제나 인간사회의 가장 기초질서인 남자와 여자의 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파괴하려 해왔다. 이 집요한 공격에 맞서 기독교 보수주의자는 성경이 말하는 사람 간 관계의 질서를 마땅히 보전해야 한다.
사람의 죄로 인해 내려질 형벌도 빠지지 않았다. “...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내가 너희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을 꺾고 ... 너희의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레 26:18-20).” 성경은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의 수고는 헛되며, 피조물인 자연조차도 인간의 노력을 거스를 것임을 이야기한다. 이 구절은 또한 “세력”을 의지하는 인간 스스로의 집단주의를 경고하기도 한다.
사도행전 4장 32절부터 35절은, 공산주의가 원래 기독교의 정신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이 근거로 삼는 본문이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그러나 한 스터디원을 통해 이 구절 어디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유재산 몰수와 분배가 없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오히려 성도들이 스스로 자기 소유를 바치는 ‘자발성’이 강조되는 구절이다.
또 한 형제를 통해 “하나님이 없다하는(시14:1)” 사회주의자들과의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 것도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20:15).” 기독교 보수주의자는 궁극의 승리를 확신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여전히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보수주의자는 겸손하고 너그러우며 동시에 담대하다.
마지막으로 전도서가 나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모든 행사는 헛되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때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 창조질서를 존중하여 지키는 것이 사람의 마땅한 본분이라는 전도서의 말씀은 사실상 기독교 보수주의의 결론이나 마찬가지다. 비(非)기독 보수주의자들과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는 이 “일의 결국”을 잘 알기 때문에 염세에 빠지지 않는다.
종교에 상관없이, 보수주의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인간 상위의 질서’가 직접 인류에게 내려준 도덕법, 즉 성경을 읽는 것은 필수적이다. 독자들도 각자 성경에서 ‘보수의 정신’을 찾아보길 권면한다. 특히 기독교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고전이나 무엇보다 성경을 더욱 가까이 해야 한다. 보수의 정신을 온전히 내면화 하는데 가장 빠른 지름길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통독에 있다. (계속)
조평세 박사(북한학, 트루스포럼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