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10분에 진행되는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 9일 모임에선 꽃제비에서 복음사역자로 거듭난 배영호 전도사(탈북민, 장신대 기독교교육과)가 간증했다.
배 전도사는 “9살에 새어머니와 싸우고 집을 뛰쳐나와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꽃제비 생활을 하게 되었다. 94년 고난의 행군 이후 대량으로 꽃제비가 생기게 되었는데, 94년 이전의 꽃제비는 대부분 가정불화로 뛰쳐나온 애들이라고 했다. 이후 자꾸 도망가니까 학교에서 콘트롤이 힘들다고 해서 함경북도 종성의 계모 학원에 보내졌다. 학원에 갈 때만 해도 안전원(경찰)을 꿈꾸고 갔는데 그 꿈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옴에 걸린 애들, 이와 빈대. 학원이라기보다 거지소굴이었다. 배가 고프니까 장 담그려고 쑤어 놓은 메주를 학원 아이들이 다 훔쳐가고 콩 종자를 심어 놓으면 숟가락으로 훔쳐왔다. 당시 고난의 행군에 들어가면서 학원에 60~70명이 허약해서 죽거나 굶어 죽었다”고 했다.
이어 “다시 학원을 뛰쳐나와서 기차를 타고 다니며 꽃제비를 했다. 개성과 자강도를 제외하고 거의 북한 전역을 기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외부세계를 못 보고 자랐기에 굶어 죽고 역전에 시체가 쓰려져 나가도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살던 동네가 탄광 마을이었는데, 부모들이 식량을 구하러 간 사이에 아이들이 죽었다. 이상하다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랑 놀던 아이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니 충격이었다. 또, 여름방학에 아버지에게 갔는데 아들을 먹이려고 종잣돈 47원을 털어서 탄광식당에 옥수수 국수 1킬로를 삶아 달라고 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남자 네다섯 명이 와서 아버지에게 국수를 훔쳤다고 뒤집어씌우고 끌고 가서 폭행했다. 문제는 우리 아버지에게만 일어난 일이라면 이상하지만 그때는 그런 일들이 허다했다”고 했다.
이어 “그렇게 살다가 청진에서 큰 역전에 갔다가 많이 잡히기도 했다. 5~6층짜리 건물에 한 방에 어른 기준으로 세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방에 애들 40명을 잡아다 놓았다. 고난의 행군 때 애들이 길거리에 너무 많이 나오니까 외부 사람이 보면 안 좋다고 김정일이 싹 잡아서 넣으라고 했었다. 한 방에 4~50명이 들어가 있다 보니 숨을 쉴 수 없었고 철창을 해 놓아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국가에서 배급도 제대로 못 주니 하루에 거짓말 보태지 않고 5~6명씩 시체가 계속 나갔다”고 했다.
배 전도사는 중국에 건너가 교회를 가게 된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온성군 남양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갔다. 북한의 시장을 생각하며 중국 시장에 들어갔는데 우리를 아주머니들이 다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북한에서 온 아이들인 걸 알아보고 중국 분들이 심부름을 시켜 주며 밥도 주고 재워주기도 했다. 2달 정도 지나 한 부부가 저희를 보고 돈을 줄 테니 일을 하지 않겠냐고 해서 따라가 다방면의 농사일을 열심히 했다. 그 아주머니가 교회 집사님이셨다. 하루는 집사님의 권유로 교회를 가게 되었다. 가기 싫은 걸 억지로 따라갔는데 집에 빨간 휘장에 빨간 방석에 십자가도 빨간색에 뭔가 잘못 온 것 같았지만 그렇게 교회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하루는 한국에서 선교사님들이 오셨다고 와 보면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갔다. 내가 봐왔던 사람 중에 그분들 만큼 환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사람들 때문에 내 인생이 바뀌게 된 계기점이 되었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분들이 안아줬다. 거부감은 있는데 따뜻했다. 그분들이 가시면서 ‘영호야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서 기도해주실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실 거야’ 하고 중국 돈 400원을 주고 갔다. 교회 오면 선교사님을 만나면 돈을 주는구나 생각했었고, 그 때 필요한 건 돈이었기에 돈을 주니까 좋았다”고 했다.
이어 “시골에 있다가 전도사님이 저를 어느 과수원에 보내셨는데, 거기에 북한 사람 40~50명이 과수원 밑에 땅굴을 파고 살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선교사가 왔다 갔다 하고 기도해주셨는데 그때 본 선교사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북한에선 굶어 죽을 각오, 매 맞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 이런 마음으로 살았는데 상상도 못한 사람들이 온 것이었다. 중국에서 먹고 사는 건 지장 없었는데 하루는 성경에 대해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하루는 교회 전도원이 예수님의 생애라고 누가복음으로 만들어 놓은 영화를 보여주셨는데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다. 이후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통독반에 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경을 배우러 갔는데 처음엔 이해를 못 했는데, 어느 순간 가다 보니까 내 마음이 점점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되었다.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살면 되지 생각했지 민족 복음은 꿈꾸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때 전도사님이 나에게 민족이라는 멍에를 메게 하셨다. 참 힘들고 버거웠다. 그때부터 우리 민족을 생각하며 다시금 내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전도사님과 사모님의 신앙과 눈물의 기도를 보면서 지웠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고 했다.
이어 “통독 반에서 2년 6개월 되던 해 전도사님과 사모님이 북경에서 철야기도를 하시다가 사모님이 체포되었다. 사모님을 위해 모든 사역장이 삼일간 금식기도에 들어갔고, 그때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줄 알았는데, 우리 사역장에 첫 순교자가 나왔다. 북한 엘리트 출신인 사모님은 오빠들이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면서 김일성을 반대하는 모임을 하다가 가족이 흩어지고 사모님 혼자 도망왔기에 북한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보위부가 사모님에게 너는 당의 배려로 수많은 걸 받아서 대학까지 다녔는데 예수를 믿으면 되겠냐고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려준다고 했었다. 사모님은 ‘당과 수령은 의무교육을 줬지만 예수님은 나에게 진리와 말씀을 주셨다. 그 진리는 살아있는 영생’이라 전하고 북한에서 순교하셨다”고 했다.
이어 “6개월 후 저를 포함해 다섯 명이 바닷가에서 철야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보위부에서 이틀 뒤에 전도사님은 평남으로 가게 되었고 그것이 내가 본 순교자의 모습이었다. 저는 그 이후로도 두 번 더 북송을 당해 총 3번 북송을 당했는데 세 번 다 성경통독반에서 체포되었다. 두 번째까지는 내가 본 순교자의 모습이 있었기에 할 수 있다고 버텼지만 세번째는 무너졌다. 북경 보위부에서 잡혔는데 내가 남조선 대사관에 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 우리의 구호는 성경을 배워서 북한으로 가자는 시대였기에 한국에 갈 꿈이 전혀 없었다. 함경북도에 있는 도 보위부에서 일 년 일 개월을 있게 되었는데 그때 37.5kg이 나갈 정도로 허약했었다”고 했다.
이어 “보위부에 들어갈 때 하나님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저를 버리셨느냐는 기도를 했다. 그때가 20대 초반이었다. 두 번은 하나님 은혜로 풀려났다고 했는데 세 번째는 더 이상 못 살 것 같았고 옆 사람들은 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전도사님과 사모님과 함께했던 70~80명도 더러는 죽고 더러는 잡혀가고 다 없어졌다. 보위부에서 한국에 가려고 했느냐 물어보는데 버티니까 타격대로 보내서 고문도 많이 받았다. 지금도 그때 각목에 맞아서 생긴 상처들이 남아 있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려고 한다. 보위부 타격대에서 소꿉친구와 마주쳤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생각했다. 그 친구는 계보가 좋은 집안이고 나는 노동자 집안이었다. 그는 승승장구해서 보위부가 되었고 난 죄수로 눈앞에 있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 친구 덕분에 많이 안 맞았다. 친구가 남조선에 가자 한 게 맞는지 안기부를 만나서 뭘 했느냐고 물었다”며 “나 같은 꼬맹이를 안기부가 만날 일이 없는데 북한이 얼마나 억지를 쓰고 웃긴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무런 토대도 없는 가난한 집이기에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면 순식간에 죽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친구를 통해서 나를 빼내셨다. 도 보위부는 풀려날 가능성이 거의 99% 없는 곳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풀려나게 된 것이다. 1년 2개월 만에 보위부에서 풀려나서 안전부로 넘어가서 4년 11개월 교화형을 받았다. 교화소는 인권이 최악인 상황인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겠다. 교화소를 한 번 갔다가 국가의 배려로 풀려난 사람이니 위에서 죽이려고 했을텐데 친구가 많이 막았다. 그 친구가 거기 있었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친구를 들어 쓰신 것”이라고 했다.
배 전도사는 “아픔이 너무 커서 이 강단에 서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26살에 한국 와서 바로 신앙을 하지는 못했고 빙빙 돌아서 돌아온 탕자같다. 지금 와서 내가 살아온 인생이 길지는 않지만 매 순간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고 그 은혜가 너무 고맙다. 언젠가 하나님이 저에게 어떤 사명을 줄지 모르기에 최선을 다해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배우고 있다. 저에겐 꿈이 하나 있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꼭 고아원을 짓고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과 잠자리 주고 말씀을 주고 싶다. 그것이 나의 기도제목이다. 북한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말씀의 준비와 재물의 문제이다. 재물을 써야 하는 목적이 분명하다면 북한 위해 쓰는 목적이라면 꼭 채워주실 거라 믿는다. 제 목적이 분명하니까 하나님께서 많은 사랑을 주시고 여러분 앞에 아팠던 과거지만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시간까지 오게 되었다. 남한에 와 있는 3만 명이 넘는 북한분들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