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어도 말씀은 뚫습니다. 이를 위해 미숙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반복해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앞 장에서 공부한 것처럼, 말씀을 읽을 때 나에게 감동을 주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 렉시오(Lectio)라면, 그 말씀을 “반복하여 읽고 하루 종일 묵상”하는 것이 메디타치오(Meditatio) 곧 묵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묵상은 말씀을 투척하는 것입니다. 마치 적의 심장부에 폭탄을 투하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한복판에 말씀을 투하하는 것입니다.
- 하정완, <수도자의 큐티>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곳곳에서 가르쳐 주고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이 있건 없건 간에 악한 음란물과 싸우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인 것이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게 기뻐하고”(고전 13:6).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가 기뻐하는 것을 나도 기뻐하게 되고, 그가 싫어하는 것은 나도 싫어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상관없이,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해 작은 일에도 순종해야 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죄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영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자산이 된다. 자칫 작아 보이는 일에 순종하기 위해서 격렬한 영적 전쟁을 치러 낸 승리자에게는 하나님이 천하의 영혼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일을 맡기실 것이다.
- 김지연 <너는 내 것이라 : 미디어와 음란물 편>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터득해야 했던 힘겨운 교훈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하나님 야웨는 자기들 뜻대로 부릴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매인 분이 아니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하기로 결정하신 이유는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나거나 수가 많은 훌륭한 민족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특별히 윤리적이거나 경건한 백성이 아님을 분명히 아셨다. 그들의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을 매료시킬 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서, 그들을 당신의 목적과 사랑을 온 세상에 알리는 민족으로 삼으시겠다는 결단은 단지 그분의 사랑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이런 사실이 특히 신명기 7:7-11에서 강조된다. 의미심장하게도, 신명기 7:7-11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 불평해서 그분의 화를 돋웠는지를 모세가 이야기하는 맥락 안에 자리 잡고 있다.
- 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요한복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