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유튜브 채널 ‘Damascus TV’의 운영자가 4일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이유’(Feat. C.S. 루이스)라는 제목의 영상을 게시했다.
운영자는 “최근 다시 읽게 된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 있는 한 챕터 내용을 요약을 해 드리려고 한다”며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제가 제일 어렵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성경 내용의 시작점, 출발점에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것에 동의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아무런 내용도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C.S. 루이스가 이 책에서 이에 대해 와 닿는 내용들을 말해 준다”고 했다.
운영자는 “서론 부분에서 C.S. 루이스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악해졌다는 말은 잘 알려져 있지만 현대인들이나 심지어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도 이게 잘 실감되지 않는다고 한다”며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1세기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시기에는 죄책감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죄의식 덕분에 기독교의 내용이 좀 더 받아들여지기 쉬웠다.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의 (죄인이라는) 진단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다”고 했다.
이어 “C.S. 루이스는 이런 상황이 된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지난 100여 년간의 도덕성 중에서 ‘친절’과 ‘자비’만 강조가 많이 되어 나머지 미덕들은 다 축소됐다고 말한다. 문제는 친절과 자비라는 것이 별 근거가 없이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덕목들이라는 것”이라며 “사람들은 자기 기분이 좋은 것을 ‘내가 친절해서 그래’라고 생각하기 쉽다. 기분이 좋다고 해서 내가 절제력이 좋다거나 겸손하다거나 순결하다거나 아니면 용맹하다거나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진 않는다. 제가 생각했을 때, 겸손이나 순결, 절제력 이런 것들이 별로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현대에서는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 컨텍스트가 많다”고 했다.
그는 “두 번째로 C.S. 루이스가 제시하는 이유는, 정신분석학이 대중들에게 수치심이란 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연의 본성과 모든 인류의 전통들은 비겁한 행동을 하면 수치심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가르쳐 왔다. 그런데 현대 문화는 이런 수치심이란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치심은 자연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왔다. 하지만 수치심은 영혼을 지켜주는 하나의 방벽이라고 얘기를 한다”며 “제가 덧붙여 보자면, 마치 고통을 받는 것은 계속 고통을 받으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걸 몸이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수치심이란 것도 우리의 신념과 마음을 지켜주는 하나의 고통과 같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수치심이란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더 중요한 것을 지켜주기 위해서 작용한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어 운영자는 “죄의식이 만약에 없다면, 하나님은 쓸데없이 계속 화를 내는 분으로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이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면서 경험을 하면서 심각한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다”며 “모두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숨기고 싶은 죄책감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 이런 죄책감의 종류는 약간 인위적으로 합리화를 해야만 덮어질 정도로 자연스럽게 드는 죄책감이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보고 거기에 염증을 느끼지 않으신다면 역설적으로 그분은 선한 존재일 수 없다. 내가 정말로 악함을 인지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에서 온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운영자는 특히 “이 책에서 C.S. 루이스가 죄를 실제라고 믿게 할 만한 여덟 가지 사실을 제시한다”고 했다.
그는 “C.S. 루이스는 첫 번째로, 아주 거룩한 사람이나 아주 교만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위선적이라고 한다. 오히려 거룩하거나 교만한 사람은 솔직할 수 있다”며 “우리는 어쩌다 한번 한 선한 행위는 매번 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싶어 하고, 자주 악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서도 어쩌다 한 것처럼 연출하고 싶어 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믿어버린다”고 한다.
이어 “두 번째로, 사회적 도덕심이 중요해질수록 개인의 죄책감을 외면하기 위해서 공동의 죄책감을 일부러 뒤집어쓰는 경우가 많다. 사회 전체의 도덕성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도덕성으로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한다”며 “제가 예를 들면, 오늘 내 옆 사람에게 상처 준 것을 덮기 위해서 공동의 죄책인 지구온난화에 몰두할 수도 있다. 공동의 죄책은 개인의 죄책을 은폐하기 굉장히 쉬운 정신승리가 될 요소가 있는 것 같다. 공동의 죄책에만 집중하면 자기의 죄가 희석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또 “C.S. 루이스는 세 번째로,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죄가 말소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며 “죄에 대한 기억이 흐려진다고 해서 그 죄 자체가 희석되는 건 아니다. 한번 저지른 악한 일은 영원히 악한 일이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그걸 씻을 수단은 시간이 아니라 회개라고 한다”고 했다.
운영자는 “C.S. 루이스는 죄를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 네 번째로 우리는 숫자가 많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며 “만약 어떤 학교에서 90%가 어떤 시험에 낙제했다면, 당연히 그 시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옆 학교의 학생들은 90%가 여기에 통과했다면, 시험 출제자의 문제가 아닌 우리 학교가 못 하는 것도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것이다. 어떤 회사나 학교나 집단들에서 행해지는 행위들이 다른 곳에 가보니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그는 “다섯 번째는, 인간사회에 세상이라는 고립지대보다 더 넓은 사회를 경험한 사람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정말 그 영적인 선한 세계 아니면 선한 신을 정말로 내가 알고 있거나 아니면 경험해 봤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다들 그러니까 괜찮은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고 C.S. 루이스는 말한다”고 했다.
운영자는 C.S. 루이스가 밝힌 여섯 번째 이유에 대해, “우리가 비겁하고 겁 많고 오만하며 나태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별 해를 끼치지 않는 이유는 복지가 우리의 안전이나 자존감이나 안락함을 잘 지켜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며 “이것에 대해 조던 피터슨의 강연이 생각이 났는데 조던 피터슨은 이렇게 반문한다. 옛날 사람들보다 우리가 훨씬 착하다고 생각을 하는 건 착각이다. 왜냐면 지금 당장 따뜻한 물도 없고 바람을 피할 지붕도 없고 밤의 어둠을 피할 불빛도 없는 상황에서 산다면, 거기서는 생존을 위해 살아야 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가 화를 내거나 야비해져야 할 상황이 상대적으로 적어졌을 뿐이지 우리의 심성 자체가 선해졌다라고 얘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일곱 번째, 현대 신학자 중에서는 기독교를 너무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영적인 온전함만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며 “쉽게 말하자면, 조금 더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기독교 신학자들이 ‘기독교는 그냥 인간이 도덕적으로 선해지기 위한 거야.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게 기독교고 사후의 구원이니 아니면 부활이니 이런 것은 없어. 그런 것은 그냥 메타포야’라고 얘기하는 것을 오히려 보수적인 쪽에서 너무 경계한 나머지 도덕적 선을 이루는 게 기독교라는 사상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하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중요하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하나님은 도덕성을 초월해 있는 분이라고 얘기한다. 도덕적인 완벽함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서는 영적인 선함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고 했다.
마지막 여덟 번째로, “사람의 본성에는 자신의 악을 결국 창조주에게 전가하고 싶어하는 그런 본능이 있다”며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악이라는 건 동물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어쩔 수 없는 유산이다. 그런 진화의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에게 내재된 어쩔 수 없는 DNA적인 본능이라고 말을 하거나 아니면 악이란 인간이 지닌 어쩔 수 없는 그런 유한한 한계일 뿐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본래 이렇게 만들어지도록 한 어떠한 힘, 자연법칙 또는 신과 같은 것에 전가 하며 나의 책임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C.S. 루이스는 사고 실험을 해보라고 한다. 지난 24시간 동안 당신이 했던 모든 잘못된 행동 아니면 잘못된 생각을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인간의 죄성이 된 것인데 자세히 보면 우리는 충분히 그걸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간절히 경건해지고 선해지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하지 않았다고 C.S. 루이스는 말한다”며 “저는 처음 이것을 읽었을 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C.S. 루이스는 결론부에서 케케묵은 전적 타락의 교리를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만약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수치심이란 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C.S. 루이스는 수치심이 좋은 게 아니라 수치심으로부터 오는 교훈이 중요한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사람이 겸손해진다면 처음에는 좀 괴로울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는 더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며 운영자는 “C.S. 루이스가 마지막으로 어필하는 것은 감정적 어필이 아니라 지성적인 어필이다. 논리적으로 사람이 악한 존재인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오히려 그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감정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운영자는 “거룩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내가 악하다는 사실을 더 잘 안다. 그래서 거룩한 사람들의 겸손은 진짜 격렬한 투쟁과 몸부림으로부터 깨닫게 된 사실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