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4년 동아시아 기독교사학 국제세미나에서 겪은 일
2004년 9월 말부터 3박4일간 홍콩 중문대학교 숭기(崇基)대학에서 동아시아 기독교사학 국제세미나가 열렸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동북아시아기독교사학협의회는 1999년 11월에 출범했는데 동년 2월부터 임시대회로 모여서, 2004년 당시 홍콩에서 모일 때에는 이미 다섯 번의 국제학술대회를 가진 뒤였다. 동북아라고 하면 한중일 삼국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당시 이 협의회는 한국과 일본 양국만을 회원국으로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경우 홍콩에서 개인 자격으로 몇 분이 2001년과 2002년 한국과 일본 대회에 참가했을 뿐, 2004년 홍콩에 모였을 때에도 아직 국가 단위의 교회사학회가 조직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중국 학자들은 본토 10명, 홍콩 11명이 참석하여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아시아기독교연구센터와 함께 이 대회를 주최했다. 세미나 주최 등의 변동으로 해서 동북아시아기독교사학협의회는 이 대회를 번외대회로 규정해야 했다.
아무튼 이 대회는 동북아 삼국 한중일 학자들이 처음으로 중국에서 함께 모인 자리였다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중국 21명, 일본 17명, 한국 20명이 함께 “기독교와 동아시아 문화의 상호작용”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가졌던 것이다. 물론 거기 영국 3명, 싱가포르 1명의 학자도 참석 했다.
한편 이 대회의 주제는 필경 두 문명의 상충을 예견한 것이었다. 기독교문명과 동아시아 문명은 서로 다르다. 기독교 문명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것이고 동아시아 문명은 유교나 불교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기독교는 종교로, 동아시아 문화는 문명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둘이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켰나 하는 것이 이 국제세미나의 주제였다.
과연 기독교는 문명과는 관계없는 종교뿐인가. 동아시아 문화는 종교와는 관계없는 문명뿐인가. 당시 특히 중국 본토에서 온 어느 학자의 발표가 기억난다. 그의 발표는 대개 기독교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의 발표의 요지는 이제까지 서양이 기독교를 해왔는데 앞으로 중국이 기독교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누가 기독교를 이끌고 가는가에 따라서 기독교의 칼라가 변한다는 것이다. 실로 위험천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서양이 믿는 기독교와 중국이 믿는 기독교가 다르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한국이 기독교를 믿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한국이 기독교화가 되는 것이지, 기독교를 한국화 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후자일 경우 거기서 기독교회의 사도적 전통과 세계적 보편성은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기독교회와는 거리가 멀게 된다. 그때 특히 한국에서 참석한 교회사학자들은 에스겔이 말한 파수꾼의 책임을 되새겼다. 잘못된 신앙으로 인한 닥쳐올 위험을 경고하지 않으면 세계가 멸망하려니와 거기 경고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은 파수꾼도 함께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2. 동도동기와 동도서기, 어떻게 달랐나
한중일 삼국이 개국과 함께 서구 기독교문명을 받아들일 때, 이미 한중일은 자신들의 종교에서 몸을 이룬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 개신교가 선교될 당시 조선의 종교는 유교로서 유교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개국을 하면서 서양의 기독교문명이 들어올 때 이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이 있었다. 하나는 기독교 문명이 들어오면 그 문명이 요체로 하고 있는 기독교도 자동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아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위정척사파의 동도동기(東道東器) 주장이다. 도(道) 즉 종교도 동양의 것, 기(器) 즉 문명도 동양의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쇄국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종과 개화파는 입장이 달랐다. 이들은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주장했다. 서기(西器), 즉 서양의 기독교문명을 받아들이더라도, 동도(東道) 즉 동양의 종교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기독교를 기독교문명과 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와 비슷한 주장이 일본과 중국에서도 있었다.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동도서기는, 앞서 말한, 2004년 중국의 학자들이 대개 주장했던 “기독교의 중국화”와 일맥상통한다.
3. 서도서기의 황해도 평안도, 기독교로 대성하다
과연 기독교와 기독교 문명이 분리 가능한가. 서도서기(西道西器)로서 기독교와 기독교가 몸을 이룬 기독교문명을 하나로 온전히 받아들인 한국인들이 있었다.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양 도가 주종을 이루었다. 복음이 아니라 문명만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취한 서울의 개화파 교회들은 그 성장이 미미했다. 그러나 기독교를 그 문명과 함께 온전히 받아들인 황평 양 도의 한국 교회는 대성했다.
당시 한국 전역의 교회가 하류층교회였다. 지주가 믿지 않는 교회를 어찌 소작인들이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농공상의 유교문명에서는 사회 하층으로 천대 받던 서북 양 도는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거기서 오는 엄청난 폭발력으로 사회계층 상향의 진취적 교회로, 중산층 교회로 거듭나고 있었다. 천황제와 반기독교의 일본이 이 서북 기독교인들을 두려워했던 것은 당연했다. 105인 사건을 두고 1913년 저술한 ‘한국교회 핍박’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이러한 내막을 간파했다. 한일합방 직후 일본이 일으킨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 날조는 다 황해도와 평안도의 진취적인 기독교인과 그들의 민족 산업을 근원에서부터 없애려던 술책이었던 것이다.
류금주 교수(서울장신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