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계관으로도 하나님을 가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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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시의 초록빛이 유지되는 이유
서로 다른 색안경을 써서 그렇게 보인다?
어떤 색안경을 써도 볼 수밖에 없는 것
안경의 비유가 가진 위험성

최휘운 독서논술 교사

프랭크 바움(Lyman Frank Baum)의 <오즈의 마법사>에는 초록빛 광채로 가득한 에메랄드 시(市)가 등장한다. 그곳은 유리창도, 하늘도, 햇살도 모두 초록색이다. 시민들의 옷도 전부 초록색이며 얼굴과 손발까지도 그렇다. 이 에메랄드 시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색안경을 써야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서 색안경 없이는 눈이 멀어 버리기 때문이다(그곳 문지기의 말이다). 안경알은 전부 초록색이며 안경 뒤로는 자물쇠를 채워 벗을 수 없게 만든다. 이 가짜 에메랄드 시의 초록빛은 오로지 초록색 안경을 통해 유지된다.

'세계관(世界觀)'은 종종 이런 안경에 비유되곤 한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색안경을 쓰고 있어서 같은 세상을 서로 다르게 보게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같은 사건에 대한 판이한 해석을 대하고 있다(좌·우 신문을 보라!). 이렇게 같은 일에 대해 상반된 해석이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까? 둘 중 어느 한쪽이 틀렸거나 양쪽 모두 틀린 것이 아닌,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져서 다르게 보이는 것뿐일까? 그럼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신론(無神論)적 견해를 가진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하나님만 아니라 모든 신(神)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무신론자의 안경을 썼고, 그것을 통해 보는 세상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안경을 벗겨 주어야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그 전까지는 하나님 얘기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일까? 로마서 1:19-20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각(知覺)이 존재한다. 만물에도 분명히 보인다. 그래서 핑계할 수 없다. 특정 안경 탓을 할 수 없는 것이다. 50년 넘게 강력한 무신론 철학자로 활동한 앤터니 플루(Antony Flew)를 보자. 그는 2004년 갑자기 신(神)의 존재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증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는 그의 신념의 결과였다. 그는 DNA 연구 결과를 보고 그것을 지성(知性)의 작품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공개 토론회에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했고, 반대 의견이 격렬히 오가리라 예상됐던 토론회는 고등한 지성의 존재를 가리키는 듯한 현대 과학의 발전 내용을 살피는 시간이 되었다('존재하는 신' 中). 자연주의에 입각한 과학도 하나님을 가리지는 못한 것이다.

과학과 거리가 먼 미개 종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칼빈(John Calvin)은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미개한 족속을 살핀다 해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이 없을 만큼 야만적이고 미개한 족속은 세상에 없다고 했다('기독교 강요' 中). 인간은 발전된 문명 속에 있든 거기서 벗어나 있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계를 시도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이다. 반틸(Cornelius Van Til)은 사람은 누구나 신의식(神意識)을 가지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가진 신의식을 물들일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했다('변증학' 中).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을 보지만 무신론과 우상숭배가 판을 친다.

게다가 이 '서로 다른 안경'에 대한 주장은 기독교 교육 안에도 들어와 있다. 더글러스 윌슨(Douglas Wilson)은 기독교 교육이 네 가지 정도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수도원 같은 형태, 둘째는 세속 지식 체계에 신앙을 덧입히려는 형태, 셋째는 기독교를 여러 관점 중 하나의 관점으로 보는 형태, 넷째는 모든 영역에서 지식을 세워 가는 기초로 성경을 굳건히 붙잡는 형태라고 했다('기독교 고전교육을 말하다' 中). 이 중 네 번째만이 성경적이다. 그리고 세계관을 안경에 비유하는 방식은 세 번째 형태, 즉 기독교를 여러 관점 중 하나로 여기는 경우와 관련된다. 기독교는 여러 관점 중 하나의 관점이 아니다. 모든 존재, 모든 문제의 올바른 해석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며, 그리스도인은 그 해석을 따르는 존재다.

"당신이 쓴 안경을 통해 보면 그렇게 보일 것이오. 하지만 내 안경을 쓰고 보면 다르게 보인다오. 내 안경도 한번 써 보지 않겠소? 싫소? 그래도 한번 써 보시오. 도저히 안 되겠소? 음.. 알겠소. 다음엔 더 열린 마음으로 얘기해 봅시다. 그때는 꼭 내 안경을···"

그리스도인은 전도(傳道)할 때 이럴 필요가 없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 정말로 하나님을 못 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 '안경의 비유'를 들며 불신자의 관점을 존중해 준다면 상대방은 고마워할까? 그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상대주의자로군.'

최휘운(독서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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