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에서 만난 탕자와 큰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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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욱 교수

 [1] 수년 전 당시 전 세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영화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을 관람한 적이 있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프랑스 국민작가 위고의 소설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만들어져 25년 동안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것을 할리우드가 엄청난 스케일의 영화로 만들어 냈는데, ‘사운드 오브 뮤직’과 ‘아마데우스’를 넘어서는 최고의 뮤지컬 영화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이긴 했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주인공 장발장과 그를 끝까지 추적하는 경찰 자베르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했다. 뮤지컬과 영화에서 자베르는 다음과 같은 짧은 대사를 장발장에게 내뱉는다. “나는 감옥에서 태어났다. 너와 같은 시궁창 출신이다.” 그러나 자베르는 역으로 악과 불법을 단죄하는 길을 선택하여 가차 없는 냉혹한 법의 수호자가 되고 만다.

[3] 이 작품을 대하다보니 다 빈치의 명작인 “최후의 만찬”에 얽혀 있는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생각났다. 화가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에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은 사람이 자신의 선택과 의지의 활용 여하에 따라서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증이다. “최후의 만찬”은 이태리의 유명한 화가인 레오날도 다 빈치에 의해 그려졌는데, 이것이 완성되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고 한다.

[4] 그림 속에 나오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의 모습은 모두 상상의 인물들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을 모델로 해서 그려졌다.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이라는 위대한 걸작을 그리기로 결정한 후에 제일 먼저 예수의 모델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수백 명의 젊은 청년들을 만나 보면서 얼굴 모습에서 무죄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으며 상처가 없고 죄로 인해 찌들어진 모습이 전혀 없는, 예수의 얼굴에 적합한 인물을 찾으려고 애썼다.

[5] 그 결과 19살 된 젊은 청년이 예수의 초상을 그릴 모델로 선정되었다. 6개월 동안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에 있어서 주인공 예수를 그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 후 6년 동안 다 빈치는 계속해서 그 작품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열두 제자들을 위한 모델들이 하나씩 하나씩 선택되어 다른 모든 인물들이 완성되었고, 마지막으로 유다의 모습이 그려질 공간만이 남게 되었다.

[6] 유다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은 30냥, 오늘날의 계산으로 $16.96의 돈으로 그의 주님을 배반한 제자 아니던가. 여러 주일 동안 다 빈치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배반한 자의 성격을 묘사할만한 사람, 사납고 굳어진 얼굴, 범죄적이고 외식하며 속이고 탐욕의 상처로 얼굴이 얼룩진 사람을 찾기 위하여 이태리 전국을 뒤졌다. 하지만 결과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유다의 얼굴에 적합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7] 어느 날, 극심한 실망에 빠져 있던 다 빈치에게 한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것은 로마의 감옥소에 사형 집행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살인수가 있는데, 그 사람이야말로 다 빈치가 찾고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 빈치는 즉시로 로마 형무소를 찾아가 그를 만나게 되었다. 거기서 다 빈치는 검게 탄 얼굴, 긴 덥수룩한 수염과 빗지 않은 머리칼이 그의 얼굴을 덮어버린 사람, 악의가 넘치고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듯한 배반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8] 드디어 이 위대한 화가는 그가 그릴 유다의 성격을 대표할 만한 사람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 황제로부터 특별한 허락을 받아 이 죄수는 몇 달 동안 위대한 작품에 나오는 가룟 유다의 실제 모델 역할을 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이 완성되던 날 다 빈치는 사형수를 지키던 간수에게 이제 그림이 끝났으니 죄수를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내도 좋다는 말을 했다. 간수들이 죄수를 끌고 나가려고 하는 순간 그가 다 빈치에게로 달려와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9] “오! 다 빈치여 나를 자세히 보십시오! 내가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십니까?” 고도로 훈련된 예리한 눈으로 6개월 동안 계속 쳐다봐왔던 그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봤지만 전에는 전혀 보지 않은 얼굴이었다. “전혀 기억이 없다”고 했더니, 그 죄수는 그의 눈을 하늘로 향하여 이렇게 절규를 했다. “오, 하나님, 내가 어쩌다가 이런 모습으로 전락되었나이까?”

[10] 그리고는 곧 그의 얼굴을 다 빈치에게 돌리면서 울부짖기를 “다 빈치여! 나를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가 바로 당신이 7년 전 예수의 모습을 그릴 때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이라오.”

“최후의 만찬” 그림에 얽힌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과 그릇된 행동이 그를 얼마나 대조적인 인물로 바꿔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11] 이와 흡사하게도 ‘레 미제라블’에서 빅토르 위고는 한 인물에서 장발장과 자베르를 다 뽑아냈다고 한다. 위고의 지인이 작은 경범죄로 억울하게 몇 년간 감옥살이를 한 뒤 출옥했는데, 그 후 정권이 바뀌면서 신설된 비밀경찰의 책임자가 되어서 이번에는 무자비하게 범죄자들을 징벌하는 존재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보면서 위고는 장발장과 자베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소설을 쓰게 된 것이다.

[12] ‘레 미제라블’을 처음 읽고 나서 한동안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거기 등장하는 장발장과 자베르가 다름 아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와 그의 형인 ‘큰 아들’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불공평한 사회 시스템의 피해자이긴 하지만 어쨌든 죄를 지은 장발장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인생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그렇게 탕자처럼 방황하던 그가 미리엘 신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앞에 회개하며 거듭난다.

[13] 죄인이었지만 미리엘 신부를 통한 아버지의 사랑에 접촉되었기에 완전히 바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나 평생 법대로만 올곧게 살아온 ‘집안의 탕자’ 자베르는 율법주의적 칼날로 장발장 같은 탕자 동생들을 사정없이 단죄한다. 정의의 수호자라고 자처하지만 늘 남을 정죄하기만 하다 보니 결코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고, 인간성이 메말라 가는데 본인만 그걸 모르고 있다.

[14] 마지막에는 그런 자베르도 장발장의 파격적인 선의와 용서에 무릎 꿇고,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의 종지부를 찍고 만다. 어찌 보면 우리 안에도 장발장과 자베르가 다 살아 있음을 본다. 전자는 드러난 죄인이요, 후자는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다. 전자는 타락한 세상에 빠져 있는 신자요, 후자는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신앙과 정죄만 남은 신자다.

[15] ‘레 미제라블’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나 메시지가 있다면 뭘까?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큰 아들 자베르처럼 허물 있는 이들을 고소하고 정죄하지 말고, 미리엘 신부처럼 탕자 장발장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배려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증오로 가득 차 있던 장발장의 영혼을 구원하여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은 것은 물론, 그를 통해 죽어가는 창녀 팡틴과 그의 딸 코제트, 연인 마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파급효과를 가져오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16] 그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자베르 같은 이가 철칙처럼 믿고 따랐던 법과 원칙이 아니라, 자신의 친절을 도둑질로 갚은 죄인을 용서하며 두 개의 은촛대를 선물로 준 미리엘 신부의 그 짧고 간단한 사랑의 터치였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당시 프랑스 혁명 때처럼 오늘날도 여전히 불우한 이웃과 절망에 빠진 청년들이 우리 사회에 가득한 현실에서 목회자이자 신학교 교수인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할까? 자베르인가 미리엘 신부인가? 미리엘 신부처럼 멋지게 살자!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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