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니 오직 천국 문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천국 문을 쭈뼛거리며 들어가고 싶지 않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예수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저 보니까 기쁘시죠?” 하며 주님의 품에 와락 안기고 싶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만 하다가 가고 싶다.
- 천정은,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에만 내 삶에 진정한 용기가 생길 수 있어요.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사랑받고 싶은 그 마음을 꾹 참고 용기를 내는 차원이 아닙니다. 별 볼 일 없고,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죽음의 십자가에 몸을 던져 나를 사랑하신 분, 용기 내신 분이 있음을 알기에 우리가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용기가 필요하시다면 이리저리 흔들리는 스펙이나 외모를 따라가다가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마시길 바라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데 근거 없이 쥐어짜낸 용기로 “나는 소중하다!”고 외치실 필요도 없어요.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몸을 던져 영원히 사랑하신, 그분만을 다시 기억해내면 돼요. 그분이 여러분의 삶을 죽을 때까지 붙드실 겁니다. 그분 안에 내 삶의 용기가 있습니다.
- 서창희, <친구를 위한 복음>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이라는 위험한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내 노력을 의지하지 않고 나를 신실하게 붙드실 그 분의 선물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빈 자리를 메워야 한다는 충동 대신에, 그 빈자리가 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임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기 시작하고,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듯 조금 더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유익을 나의 유익처럼 바라기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정의를 향한 열정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자라납니다. 내게 좋은 것이 다른 이에게도 좋다는 식의 사고를 중단하고 다른 이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은 내게도 좋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 로완 윌리엄스, <루미나리스>
기독교는 책과 문자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전통입니다. 이 점에서 플라톤이나 근대의 데카르트 전통, 그리고 선불교와 노장 전통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유교 전통은 불교 전통에 비하면 경전과 주석서에 훨씬 높은 가치를 두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유교가 섬기는 ‘주제천’(主帝天) 개념의 ‘하늘’(天)은 공자가 자공의 물음에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라고 대꾸한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말하지 않고 자신을 알려 주지 않는 하늘입니다.…이와는 반대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마르틴 루터가 강조했듯이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입니다.
- 강영안, <읽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