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땅의 약속과 땅 소유 문제
1. 가나안 땅의 약속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그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그의 자손이 수적으로 크게 번성해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약속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절망적 상황이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점점 많아질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사라도 단산되어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그런 절망 속에서 아브라함은 25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축복이기보다는 신앙으로 극복해야할 걸림돌이었다.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손번성과 함께 땅이 필요했다. 자손이 아무리 많아도 땅이 없으면 유랑민 신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는 자손번성과 더불어 땅 소유가 포함되어 있다. 땅 문제 역시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으로 극복할 과제였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주해 온 가나안은 빈 공간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이 정착하여 살아온 땅이었다. 사라의 매장지로 막벨라 굴을 구입한 것을 제외하면,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어떤 땅도 소유한 적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차지한 것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이후이다.
땅 문제도 아브라함에게 신앙으로 극복해야할 난제였다. 자녀출생과 마찬가지로 땅 소유도 전혀 실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이 어떤 신분으로 살았는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아브라함은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창 23:4)로 소개하였다. 여기에서 ‘나그네’로 번역된 히브리어 ‘게르’와 ‘우거하는 자’로 번역된 ‘토샤브’는 사회 계층을 지칭하는 전문용어였다. 이들은 특별한 상황 때문에 자신들의 연고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살아가는 외국거류민이었다. 이들에게는 정상적인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다만 주변사람들의 환대에 근거하여 살아갈 수 있었다. 헤브론에서 아브라함의 신분이 그러했고(창 23:4),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그렇게 살았으며(출 2:22) 베들레헴의 엘리멜렉 가족 역시 모압에서 그런 신분이었다.(룻 1:1) 이들에게는 일하면서 살수 있는 생존권은 있었지만,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시민권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당시 사회의 신분상 땅을 소유할 자격마저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과제였다.
아브라함에게 땅 약속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세겜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고 하셨다. 자손번성 약속이 부름을 받았을 때 주어진 것이라면, 땅의 약속은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에 주어졌다. 땅에 관한 약속에는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그의 자손도 공동수혜자로 언급되어 있다. 땅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을 미리 밝힌 것이다.
하나님의 땅 약속은 그 이후로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창 13:14-17; 15:7-8; 17:8) 그런데 땅에 관한 약속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자손번성의 약속이 함께 주어졌다. 이것은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약속과 땅의 약속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땅과 관련된 두 번째 약속은 롯과 분가하여 헤어진 후에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장으로서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더 좋아 보이는 요단들을 롯에게 양보하였다. 그는 롯과 반대되는 산간지역의 헤브론으로 옮겼다.
그때 하나님은 보다 구체적으로 땅 약속을 확인해 주셨다. 기득권의 포기로 풍요의 기회를 놓친 셈이었지만, 그 대신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약속을 다시 확인해 주셨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에 이르리라.”(창 13:14-15) 하나님은 다시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땅의 약속은 눈으로 바라보고 발로 걸어보는 구체적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지금 당장 소유할 수 있는 땅은 아니었지만 눈과 발로 직접 확인해봄으로 아브라함은 땅의 비전을 분명하게 소유할 수 있었다. 성경에서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바라는 것의 실상과 보이지 않는 증거를 직접 경험케 하신 것이다.
그 후 아브라함에게 땅의 약속이 다시 주어진 것은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겠다는 아브라함의 요청이 있을 때다. 하나님은 밖으로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 하늘의 뭇별처럼 그의 자손이 많게 될 것을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자녀 문제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땅의 약속을 확인해 주셨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라.” 이에 아브라함은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녀 문제와 더불어 땅에 관한 약속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언약의식을 통하여 땅의 약속이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확신을 심어주셨다.(창 15:9-21)
고대 근동에서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서로가 그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다짐으로 동물을 잡아 쪼개어 놓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만일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약속 불이행자가 동물의 사체처럼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맹세가 포함된 엄숙한 의식이었다. 언약 의식에는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동물들이 사용되었는데, 마리에 살았던 아모리인들은 나귀를 잡아 언약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는 ‘나귀를 잡아 죽인다’는 표현은 곧 ‘계약을 맺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지에 살던 후리인들은 소 한 마리, 나귀 한 마리, 양 열 마리를 잡아 언약의식을 거행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잡아 그 중간을 쪼개어 마주 놓았다. 하나님은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 모양으로 동물 사체 사이를 지나가셨다.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땅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확신시켜 주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속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남의 나라에서 사백년 동안 종노릇할 것과 그 이후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 명시되어 있다. 땅의 약속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아브라함의 후손은 사백년이라는 비교적 긴 기간을 보내야 했다 성경은 그 이유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는 아모리인들의 죄악이 아직 벌을 받을 정도에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창 15:16)
왜 성경은 땅의 약속이 성취되는 시기를 아모리인들의 죄악과 연결시키고 있을까? 그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땅 개념과 관련이 있다. 히브리인들에게 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상은 당연한 귀결이다. 모든 땅이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것은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땅을 줄 수 있는 권한도 포함된다. 모든 땅을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신 대로, 그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땅 개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영원한 소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땅을 선물로 받았을 뿐이지 땅의 실제 주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 땅을 주신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만 한다. 만일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나는 삶을 살면, 땅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실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아모리인들의 죄악과 땅 약속이 관련된 이유이다. 땅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차지하고 있는 아모리인들의 죄악에 따라 그 시기가 결정되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방에서 사백년을 지내며 기다려야 했다. (계속)
권혁승 박사(전 서울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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