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트루스포럼’의 연구위원인 조평세 박사(북한학)가 본지에 ‘기독교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를 매주 한 차례 연재할 예정입니다.
미국에서 보수주의를 이야기할 때 종종 등장하는 수식어가 바로 ‘유대기독교’(Judeo-Christian)이다. 서구문명을 이야기할 때도 보통 유대기독교 가치관 혹은 유대기독교 전통을 언급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지는 서양철학이나 에드먼드 버크의 사상으로 시작된다고 여겨지는 보수주의에 비해, ‘유대기독교 전통’은 20세기 중반에 특히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비교적 최근 개념으로 그 의미가 뚜렷하지 않다. 때문에 유대기독교 가치관이 등장한 배경과 그 의미,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 보수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유대기독교라는 표현은 어떤 종교집단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물론 19세기부터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을 뜻하는 말로 ‘유대기독교인’(‘메시아닉쥬’)이라는 명칭을 써왔지만, 유대기독교 가치관이라고 표현할 때의 그 범위는 특정 종교인들을 뜻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내포한다. 또 그렇다고 ‘유대기독교’라는 표현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보다 넓은 의미의 신학적 틀로 묶는 것도 아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분명 완전히 다른 종교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기독교를 거부하기 때문에 유대교인 것이고, 기독교는 유대교를 거부하기 때문에 기독교인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기독교 가치관’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갑자기 20세기 미국 정치 담론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유대인들은 미국 초창기부터 항상 함께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미국에 유대인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은 1880년대이다. 당시 동유럽의 박해를 피해 건너온 유대인들은 40년 만에 미국 내 1% 미만에서 3.5%로 증가한다. 이와 함께 KKK(Ku Klux Klan)와 같은 인종차별 조직이 부활하는 등 반(反)유대주의 운동도 한때 성행했지만, 동시에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미국사회가 유대인들을 품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늘어난다. 특히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들을 통해 나치의 유대인학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동정심과 공감대도 커진다.
결정적으로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린 사건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2월 3일, 독일군 유보트(U-223) 잠수함이 격침한 미군 수송선 도체스터 호(SS Dorchester)에서 일어났다. 선상에는 대부분 신병으로 구성된 902명의 미군이 타고 있었고, 그 중에는 군종장교로 자원입대한 개신교 목사 조지 폭스(George L. Fox)와 클라크 폴링(Clark V. Poling), 가톨릭 신부 존 워싱턴(John P. Washington), 그리고 유대교 랍비 알렉산더 굿(Alexander B. Goode)이 타고 있었다. 새벽 한시 경 나치군의 어뢰를 정통으로 맞은 도체스터 호는 불과 20분 만에 가라앉았고 무려 674명이 한겨울밤 바다에 수장되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4명의 군종장교는 자신들의 구명조끼를 병사들에게 내어주고 배와 함께 수장되면서 공포에 떨고 있는 병사들을 위해 함께 손을 잡고 찬양과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개신교와 가톨릭과 유대교라는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군종장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병사들을 위해 헌신하며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는 소식은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은 또한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과 재림에 대한 소망을 한층 키워주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유대기독교’라는 표현이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1952년 12월 22일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은 취임 한 달을 앞두고 즉석으로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권리에 대해] 우리 국부들은 이렇게 설명했지요. ‘모든 사람이 창조주로부터 그 권리들을 부여받았다.’ 즉 어떤 출생의 우연이나 피부의 색깔이나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 정부형태는 어떤 아주 깊은 종교적 신앙 위에 기초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종교가 어떤 것이든 말이죠. 물론 그것은 우리에게 유대기독교 가치관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종교입니다.”
100여 년 전 남북전쟁 중 링컨이 미국의 건국정신을 재천명하며 노예를 해방시켰듯이,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 소련과 치열한 냉전에 돌입하며 미국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나라임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할 필요가 있었다. 1954년 아이젠하워 정부는 국기에 대한 맹세(Pledge of Allegiance)에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했던 ‘하나님 아래서’(Under God)라는 표현을 법령으로 추가한다. 그리고 1956년에는 링컨 행정부가 미국 동전에 새겨 넣었던 ‘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미국의 공식 표어로 채택하고 모든 화폐에 새겨 넣는다.
결국 유대기독교 가치관이란, 고대 그리스 헬라철학의 ‘알지 못하는 신(행17:23)’이 아닌, 모세의 광야에서 유대인들에게 도덕률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세계관을 말한다. 미국은 초창기 정착부터 독립과 건국까지 이 세계관에 입각한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20세기 세계대전 중 유대인들이 처한 곤경과 무신론 세력과의 냉전을 통해 그 세계관을 재발견하고 미국의 공적 가치관으로 재천명한 것이다.
한편 유대기독교 가치관을 ‘아브라함 종교’(Abrahamic Religion)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려는 일부 세속주의자들의 억지스런 경향도 있다. 그 의도는 우선 유대기독교 가치관이 내포하고 있는 보편적 세계관을 특정 종교의 의식구조 개념으로 축소하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유대기독교 가치관이 아브라함에게 뿌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슬람권도 하나의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조상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라는 가정부터 이슬람권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아니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대기독교 가치관은 아브라함으로부터 한참 후대인 모세가 광야에서 받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초하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유대기독교 가치관이 미국 정치담론에 등장하게 된 것은, 미국의 건국정신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미국 보수주의가 부활하게 된 배경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미국 보수주의와 유럽 보수주의의 궁극적인 차이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계속)
조평세 박사(북한학, 트루스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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