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항쟁과 문용동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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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

“5월의 문용동은 웃고 있지만, 소강석은 울고 있어요”

5월이 오면 제 머릿속에는 항상 5.18민주항쟁이 떠오릅니다. 저는 주님의 소명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 난생 처음 광주로 가서 광주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5월에 5.18민주항쟁을 맞았습니다. 그때 나이 만 19세였습니다. 당시 저는 뚜렷한 역사의식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감격과 믿음, 성령 충만한 삶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수부대가 광주를 점령하여 금남로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때 총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그 길을 걸어서 조선대학교 앞에 있는 광주서광교회를 다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한때 그것이 저의 젊음의 자랑거리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저와 동시대에 호남신학교를 다니던 문용동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저보다 여덟 살 많은 호남신학교 4학년생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지나가다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진압봉으로 맞은 시민을 업어서 기독병원 응급실에 데려다주고 그날부로 시민군에 참여합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얼마나 그가 의협심에 불타고 정의감으로 가득 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수도경비사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화약과 탄약에 익숙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남도청을 지키고 있을 때 도청 지하실에는 화순탄광에서 가져온 8톤짜리 트럭 네 대 분량의 다이너마이트가 있었습니다. 그때 시민군 강경파에서는 공수단이 도청으로 진격해 오면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광주시의 3분의 1 가까이 희생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용동은 광주전투교육사령부의 김기식 부사령관을 찾아가서 탄약을 제거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김기식 장군은 탄약 분해 전문가인 배승일 군무관을 비밀리에 급파하여 문용동과 함께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했습니다. 그 이후, 문용동은 도망가면 살 수 있었는데 끝까지 그곳을 지키다가 헬기 사격으로 죽습니다. 광주시민들의 안전을 끝까지 지키려다가 죽은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훗날 그는 군 정보사의 공작에 의해 프락치로 오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함께 있던 사람들의 증언과 그의 일기장에 의해서 그는 프락치가 아니고 거룩한 의인이요, 순교자로 드러나게 된 것이죠.

호남신학대 교정에는 그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는 죽었으나 믿음으로 말하고 있느니라.” 5월이 오면 그는 천국에서 저를 향해 항상 웃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미소를 바라볼 때마다 마냥 부끄럽기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금남로 길을 다녔던 광주신학생 소강석은 살려 주시고 탄약고를 지키던 호남신학생 문영동은 왜 의로운 죽음을 당하게 하셨을까. 나는 과연 산 자의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일까.”

그는 새벽길을 간 사람이고 저는 지금 살아서 캄캄한 암흑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죽어서 웃고 있고 저는 살아서 울고 있습니다. 그때는 역사의식이 없었지만, 지금은 문용동의 역사혼을 가지고 산 자의 값을 치르려고 울며 고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가 가야 할 길을 바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산 자의 값을 제대로 치르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기에 저는 그 해 5월의 하늘을 생각하며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예장 합동 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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