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화 교장 “하나님 믿고 나니 탈북이 운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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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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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기도운동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서 간증
에스더기도운동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에서 주명화 교장이 간증을 했다. ©에스도기도운동 유튜브 영상캡쳐

에스더기도운동 탈북민센터가 12일 오전 ‘북한구원 화요모임’을 개최했다. 이날 모임에선 탈북자로 탈북민 대안학교인 금강학교와 금강지역아동센터의 대표를 맡고 있는 주명화 교장이 간증을 했다.

주 교장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한국에 와서 믿게 됐다. 북한에 있을 때는 고등중학교 교사를 10여 년 했다. 2008년에 한국에 들어왔다”며 “2007년 북한에 있을 때, 중국에 있는 친척 집에 방문한 후 잠시 연길의 식당에서 일했는데 그때 식당에 있던 탈북민을 보며 북한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이어 “탈북을 고민하던 때에, 북한 당 조직에서 러시아 아카데미 공연이 있으니 행사장으로 나오라고 했다. 생각 없이 경기장으로 갔는데 그곳이 하룻밤 사이에 사형장이 됐다. 4명의 사람을 묶어 세워뒀다. 1명은 여자였고 3명은 남자였는데, 2명은 사형이고 2명은 무기징역이었다”며 “여자가 사형을 선고받은 이유는 CD에 한국 영화를 500장 넣어 팔았다는 것이고, 한 명은 자수성가한 사람인데 당에 대한 도전이라는 죄명으로 잡혔다. 죽을죄는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심문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자기 발언을 못 했다. 총살하는데 보통 사형수 3명이 각 3발씩 쓰는데 한 사람당 10발씩 쐈다”고 했다.

주 교장은 ”잔인하게 사형하는 것을 본 순간 남아 있을 미련이 없어져 다음날 딸을 데리고 바로 떠났다. 중국에 친척이 많아 2007년에 중국으로 탈북해 은신한 후 다음 해에 브로커를 만났다. 내몽고까지는 알아서 가야 해 친척분이 함께 가줬다. 내몽고에서 함께 탈북할 분을 만났는데 그분은 엄청 두꺼운 성경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사우나에서도 항상 가지고 다녔다. 그때는 신앙이 없어 갈 길이 머니 그 책을 버리면 안 되냐고 했었다”고 했다.

이어 “저녁에 출발해야 하는데, 종교는 모르지만, 하늘을 한참 올라다 보며 ‘신이 있으면 저희를 도와주세요’라고 했다. 그때가 영하 42도였다. 두 시간을 걸으니 철조망이 보였다. 느슨했다. 그 시간 동안 성경책을 든 아저씨는 계속 그것을 들고 갔다”며 “몽골 철조망에 도착했는데 높이가 2미터였다. 그래서 한 사람씩 넘었다. 그 와중에 성경책이 없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철조망을 넘은 후 역으로 간 후 몽골 군인에게 잡혔다. 혹독하게 심문을 받고 6개월 후 한국에 왔다”고 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한국기독교 본부장을 하고 계신 석 장로님에게 전화가 왔다. 교회에 갔으면 좋겠다는 전화였다. 하나님은 모르지만 석 장로님을 존경해서 교회에 갔다. 관악구에 있는 교회에 처음 가게 됐다. 하나님을 알게 된 후 운이 좋아 탈북을 하게 된 것이 아닌 것을 깨닫고 또 하나님이 몽골 사막에서 함께 계셨다는 걸 몰랐던 것에 대해 회개를 했다”고 했다.

주 교장은 “국정원에서 제게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서, 교사를 하려고 한다고 했는데 북한 학력은 인정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간호조무사 공부를 했다. 산후조리원 신생아실에서 일하며 요양복지사, 사회복지사 등 자격증을 따다 보니 10여 개를 땄다. 그러던 중 장신대 주선애 교수님을 만났다. 헤어질 때 주선애 교수님이 저에게 교사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어 “헤어진 다음에, 교육개발원에서 북한 교사들에게 교육 연수를 받게 해줬다. 6개월 공부를 하고 시험을 쳤다. 그 후 한국의 부진한 학생들 학습지도를 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의 7차 교육과정, 교육시스템을 배웠다. 이때 많은 탈북민 아이들이 한국어가 안돼서 제도권 교육에 못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됐다”며 “이 아이들에게 디딤돌 교육을 해주자는 생각으로 방과 후 공부방을 2013년에 시작했다. 교사 3명이 3천만 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용감하게 건물을 보러 다녔다. 운이 좋게 실향민분을 만나 보증금과 월세를 절반으로 내려줬다.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밥을 먹였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7명 있었다. 몇 달이 지나니 많이 늘었다. 그래서 대안학교를 하게 됐다”고 했다.

주 교장은 “당장 쓸 돈도 없어 선생님들과 열심히 기도하던 중 어느 날 미국에서 돈을 보내줬다. 또 알게 모르게 저희에게 많은 분이 힘을 주시고 성원해 주셨다. 요양병원이 학원 옆이어서 다른 곳에 옮기게 됐는데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충북에 계신 분이 보증금을 도와주셔 새로운 곳에 보금자리를 꾸미게 됐다”고 했다.

이어 주 교장은 탈북민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사용하는 언어가 북한과 한국이 많이 다르다. 한국은 외래어를 많이 쓴다. 아이들을 적응시키는데 힘들어하고 있다”며 “또 탈북민을 향한 사회적 편견 이 크다. 탈북민을 싸잡아 욕할 때면 마음이 아프다. 북쪽에서 온 한민족으로 봐주면 좋겠다”고 했다.

주 교장은 “탈북민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안정을 시키기 위해 합창단을 만들었다. 계속 연습을 하다 보니 화음이 맞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초청을 받아 광화문, 잠실에서 공연을 했다”고 했다.

이어 “이 아이들은 어른들이 겪기에도 벅찬 눈 앞에서 엄마가 북송되고 부모님이 죽는 모습을 보는 등의 경험을 했다. 표현을 안해서 그렇지 아이들이 대화할 때는 울면서 대화를 한다”며 정서적 안정의 중요성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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