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과 혀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지체 중에서 뼈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는 이 혀가 바로 말의 향방을 좌우하는 재갈과 같은 역할을 감당합니다. 또 인간의 혀는 큰 배의 운명을 좌우하는 키와 같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건을 싣고 많은 사람을 태워서 간다 할지라도 뒤에 붙어 있는 작은 키가 잘못돼 버리면 암초에도 부딪히고 처음 목적지와는 다르게 엉뚱한 데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비유하기를 불과 같다 했습니다. 불은 잘 이용하면 추위를 이기는데 도움이 되고, 쇠를 녹여서 좋은 물건을 만들고, 우리 생활에 굉장히 유익하지만 이 불을 잘못 썼을 때는 집을 사르고 산을 숯덩이로 만들고 자연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야고보는 인간의 말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하며 좋은 사람은 좋은 말을 하고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또 한 샘에서 어떻게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찬송하는 입술은 단 물을 내는 것이고 사람을 향해서 미워하고 불평하고 저주하는 것은 쓴 물을 내는 것입니다. 한 입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도 하고 그 입을 가지고 남을 이간시키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무로 비유해서 말했습니다. 무화과나무에는 무화과 열매가 맺혀져야 정상이고 감람나무에는 감람 열매가 맺혀져야 정상입니다. 포도나무에는 포도 열매가 맺혀져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포도나무에서 다른 열매가 맺혀질 수 있느냐고 비유를 통해 교훈했습니다. 성도라면 성도다운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구원받은 성도라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있어야 하는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삶과 똑같을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지혜’에 대한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지혜와 온유함으로 그 행실을 보이라고 합니다. 참 지혜는 좋은 행실을 가집니다. 참 믿음은 바른 행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종교는 고도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교만과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약 3:14)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와 야고보 사도가 활동할 당시에도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시기와 다툼에 붙들려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시기와 다툼이 있다는 것은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표면화된다면 그것은 진리가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교회가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난 교회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 세상에 뿌리를 두고 나타나는 지혜의 열매
시기와 다툼은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5~16)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분쟁이 있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고, 세상의 방법과 권세는 육에 속한 것이어서 육신적인 충동으로 인해 시기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세상적인 방법은 한 사람을 밟아야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시기와 다툼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가 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성령의 사람인지 악령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했습니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시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있었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 시작은 시기였습니다. 가인도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아벨도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양을 치는 사람은 양의 첫 새끼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농사를 지은 가인은 농사한 곡식을 가지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 앞에 열납 되기를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단 중에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단에 불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단에는 불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인의 안색이 변했습니다. ‘왜 하나님 나에게는 불을 안 내리십니까? 나에게는 왜 은혜를 주지 않습니까?’ 하고 얼굴색이 변해 있다가 자기의 동생을 만나자 그를 쳐 죽였습니다. 살인죄는 시기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창 4:4~7). 타락한 인생은 내가 잘되는 것보다 남이 안 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가인은 아벨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것을 시기해서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살인사건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향하여 제단을 드렸던 사람들이 이렇게 시기와 질투 속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구약성경을 보면 기원전 538년에 다리오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다리오 왕은 나라를 다스릴 때 120 방백을 거느렸습니다. 120 방백 위에 세 사람의 총리를 두었습니다. 이 세 총리 중에서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에게는 신통의 은혜를 주셔서 다니엘은 120 방백과 두 명의 총리도 당할 수 없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리오 왕이 다니엘의 말만 듣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절대로 왕이 손해 보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명성이 점점 올라가고 나라가 다니엘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두 총리와 방백들의 마음속에 시기가 싹텄습니다. 어떻게 하면 포로로 끌려와서 총리가 된 다니엘을 죽일 수 있을까? 고소해서 없앨 길이 없을까? 생각을 하다가 악법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악법은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 (단 6:7) 입니다. 다니엘이 걸려들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로 세상의 요소가 이런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 악법에 따라서 사자 굴에 들어갔지만 담대했으며 도망가지도, 떨지도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다니엘을 넘어뜨리려고 했지만 다니엘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중단할 수가 없다. 나는 기도한다.’ 다니엘은 옛날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사자 굴에 들어간 것입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것입니다(마 10:39). 다니엘은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겠다’ 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사자의 입을 꽉 막아주셨습니다. 세상의 악법은 선한 법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며칠 동안 굶겨놓은 배고픈 사자들도 다니엘을 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일찍 다리오 왕은 사자굴에 갔습니다. “다니엘아! 살아 있느냐?” 라고 묻자 “왕이여! 저는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화가 났습니다. ‘이 악법을 만들어 다니엘을 대적하는 자들을 집어넣으라’ 고 명령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굴 밑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배고픈 사자들이 탁 받아가지고 씹어서 자기의 먹이로 삼았습니다(단 6장).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시기와 다툼이 생깁니까? 비교의식 때문에 생깁니다. 시기와 다툼은 비교할 때 생깁니다. 자신과 상대를 비교하면서 부모님과 하나님을 늘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남편은 아내를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고, 어떤 아내는 남편을 다른 남자들과 자꾸 비교합니다. 비교할 때 시기와 질투가 일어납니다.
한 여성도가 있었는데 그는 행복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상담을 해 보았더니 그 분의 말속에서 비교의식이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여인은 명문대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청렴하고 결백한 공무원과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 역시도 상당한 지위가 있었습니다. 부부는 자녀를 키우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중년쯤 되어 명문대 동창회에 몇 번 나갔습니다. 그 후부터 이 여인이 우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창회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가 푹 죽어서 삽니다. 왜냐하면 친구 중에서 고급 차를 타고 다니고 돈도 펑펑 쓰는 상당한 재력가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남편하고 자기 남편을 비교했습니다. 잘 배운 내 남편이 왜 돈을 못 벌어 오는지, 자기의 가난한 것만 바라보면서 늘 돈타령을 하고, 남편을 보면 투정부리고 남편을 존경하지 않고 짜증을 부리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잠 22:1) 라고 말씀합니다. 제가 볼 때는 훌륭한 남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기 남편을 낮게 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와 남편과 자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많이 배우지 못했는데 저 사람은 많이 배웠구나’하며 자꾸 비교하다 보니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비교할 것 없습니다. 다리는 다리대로 잘났고 손은 손대로 잘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못 배운 사람에게는 기억력이라도 좋게 하고 무엇을 하더라도 열심히 하게 만들고 많이 배운 사람들은 배운 대로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지고 사회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옛말에 ‘남 앞에 있는 밥그릇이 더 커 보인다’ 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시기와 다툼은 비교의식에서 많이 나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시기와 다툼이 생기면 안 됩니다. 오늘 여기에서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는 대상은 불신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놓고 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시기와 다툼이 있으니 자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에도 시기가 생길 수 있고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교회의 모습이 없어지고 교회 안이 장사꾼의 소굴이 되어버립니다. 말 잘하는 사람은 선동하고 부자들은 권력을 부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소외되어 교회가 세상처럼 되어버립니다. 교회는 모두 동일하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편견 없이 찬양하고 기뻐하고 평안을 이루는 곳입니다. 교회는 등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라”(고전 14:33) 요란과 악한 일을 가져오는 시기와 다툼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 지혜의 열매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에 뿌리를 두고 나타나는 열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성결은 순결한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성결한 생활,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한 열매, 선한 열매 그것이 바로 믿는 사람의 열매입니다.
지혜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관용이 있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잘 할 수 있습니다. 남을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런데 화평을 추구하는 우리들은 절대로 사람을 기준해서 화평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에 의해서 화평의 마음이 있고 없고 한다면, 상대는 늘 변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화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닮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토마스 아켐페스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가 화평을 원하느냐 사람을 바라보며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서 너희가 화평하기를 원한다면 평생 못할 것이다’
가족이 열 명이라고 할 때 다 기분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이 사람이 삐뚤어지고 내일은 저 사람이 삐뚤어지는데 삐뚤어지는 그 사람을 바라보면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므로 화평할 때는 위에서 오는 힘, 위에서 주는 지혜를 가지고 화평해야 합니다.
양순은 순종심을 의미합니다. 긍휼은 실제적인 원조에 나아가게 하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선한 열매는 상대에 대한 호의로 가는 미덕입니다. 편벽이 없다고 하는 말은 까다롭게 남을 심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남편이 아내를 까다롭게 심사하면 아내는 몸 둘 바를 모를 것입니다. 아내가 또 남편을 바라보면서 까다롭게 심사하면 사랑이 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편안하게 해야지 까다롭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가져야 될 복은 화목과 평화가 제일 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말을 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돈이 없어도 화평을 먼저 합시다. 돈 많이 벌어올 실력이 없거든 먼저 화평합시다. 돈을 많이 벌어 놓으셨다 하더라도 화평이 없으면, 화목이 없으면 화목이 있는 가정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2:6)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면 세상의 지혜로 살지 않고 통치자들의 지혜로도 살지 않습니다. 전도도 세상의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생활은 성령에 지배받는 생활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 속에는 사랑이 생깁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밤에 캄캄한 곳을 가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무섭지 않습니다. 서로 이만큼 데려다 주다가 또 염려가 되어 또 다시 데려다 주었다가, 또 심심하니까 같이 가고 밤새도록 왔다 갔다 해도 피곤하지가 않은 것은 진정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이 환하게 웃어집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제일 먼저는 사랑이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사랑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를 가슴에 가득히 채워서 삽시다. 성령으로 행할 때에 성령 앞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사랑에는 헌신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은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표현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남을 못살게 하는 사람은 다음에 자신도 못살게 합니다. 세상도 그런데 하물며 교회 안에서 시기와 질투를 한다면 그 사람의 형편은 어떻게 될까요? 세상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시기 질투 하지 말고 화평으로 하나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잠언 22장 7절을 보면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업하는 분은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한다고 했습니다. 가난은 자랑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십시오. 남에게 빚을 지기보다는 차라리 꾸어 줄 수 있는 그런 넉넉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합시다. 우리는 무엇을 맡든지 자기의 맡은 그 일을 열심히 해서 머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평신도보다 열심히 충성해서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을 가지고 주의 종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길 바랍니다.
여러분! 꿈을 가지세요.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나라와 민족 속에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을 가지고 가정에서는 가정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자기의 믿음을 회복하고, 가정의 믿음의 동지를 위해 가정예배를 드립시다. 그 다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이웃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전도하고 들은 말씀을 생활화하고 삶의 열매를 맺읍시다. 청소년, 노인, 장애인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 소임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