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나를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하시고 때에 따라 넘치게 공급하고 계시다. 그 선물은 아주 클 때도 있고, 아주 소소할 때도 있다. 어떤 것이든 주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이 내 삶에 기쁨이 된다. 무뎌진 심장을 뛰게 해주는 뜻밖의 길거리 공연,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는 아름다운 석양, 지친 몸과 마음에 새 힘을 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 고통 중에 들려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음성. 나이를 먹을수록 감탄사가 점차 줄어든다고 하는데, 때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하고 그것에 감탄할 줄 아는 아들이 되고 싶다. “이야, 예쁘다! 아빠 최고!"
- 안재호, <아빠, 아버지>
악마는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탄이 가장 미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공의의 감각에 호소한다. “그 사람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게 내버려 둘 거야?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 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거야. 네가 그걸 허용해 줬으니까 말이야. 호구가 되고 싶다면 할 수 없지. 얼마나 그렇게 할 수 있나 보자.” 그의 말이 맞다. 용서하는 사람은 이용당한다. 하지만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2장 11절에서 말하듯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다!
- 제라드 윌슨, <거짓 복음>
우리의 애통이 기도에서 참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아버지를 향하고 그 기도를 하늘에서 [하나님이] 듣는 순간, 우리의 애통은 인간의 슬픔을 쏟아 내는 것 그 이상이 된다. 이것은 그 자신 속에 미래에 받을 구원의 씨, 그러므로 찬양의 씨를 담고 있다. 우리의 기도에서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신음하는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사역으로 말이다. 찬양은 미래에 완성될 진리를 지금 전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찬양하는 이유는 현재가 수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가 영광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찬양은 현재의 행복한 환경 때문에 기쁜 마음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미래의 영광을 확신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 크리스토퍼 애쉬, <티칭 시편>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서 어쩜 그렇게도 쉽게 내어 쫓김을 당할 수 있었는지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왜 예수님이 자신의 교회 외부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셔야 했는지 이상하다고 여긴 적이 없는가? 우리도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애초에 어떻게 그분은 자기 백성에게서 쫓겨난 것일까?” 솔직하게 물어보자. “나의 공동체에 실제로 주님이신 진짜 예수님이 계시는가?” 이 질문에 좌불안석할 수도 있다, 진짜로. 사도적 특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배워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원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방법이 생긴다. 우리는 끊임없이 믿음의 주께로 돌아가서 그분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 개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재보정해야 한다. 기독교는 본질에서 하나의 ‘예수 운동’이지 그것을 빙자한 종교가 아니다.
- 앨런 허쉬, <잊혀진 교회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