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피자를 즐기고 있었다. 문득 주위 분위기가 평소 같지 않아 고개를 들어보았다. '언제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졌지?' 계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있고 뒤쪽에는 무표정에 카트를 미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용하다. TV의 음소거 상태처럼 고요하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절제된 침묵 속에 불안이 가득하다.
분명 정상이 아니다. 패닉 바이(Panic Buy)다. '필요한 물건이 다 떨어지면 난 어쩌지?' '다른 사람이 먼저 다 가져가면 어쩌지?' 삑삑, 삑삑, 스캔하는 소리가 들린다. 화장지와 생수 박스, 캔 음식들이다. 덩달아 급해진다. 먹던 음식을 버리고 화장지 진열대로 급히 발을 옮겼다. '앗! 텅 비어 있다! 화장지 없이 어떻게 살지? ... 근데 왜 화장지지?' 감정이 생각을 지배한다.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이성에게 명령한다. '네가 먼저 살고 봐야지. 너라도 살아야지. 가만히 있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야. 뭐라도 해. 계속해. 그렇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 충분하지 않아! 더, 더, 더!' 공황 상태다. 패닉이다.
패닉(Panic, 공황)이라는 말은 본래 그리스 신화의 판(Pan)이라는 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판(Pan)은 숲 속에 숨어있다가 지나는 여행자를 바스락 소리를 내서 깜짝 놀라게 하는 신이다. 패닉은 무언가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게 만드는 공포심이다. 무섭게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것에서 도망치기 위해 순간적으로 운동 에너지를 발산하도록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가빠진다. 곧 죽을 것 같은 공포심이 느껴지고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이 패닉이다.
무서운 바이러스가 지역과 나라를 넘어, 세계에 창궐하는 상황을 뉴스와 신문을 통해 접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TV 뉴스 화면에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이나 병원 침상에서 치료를 받는 모습이나 감염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를 자주 접한다. '여기 우리는 괜찮을까?'라는 질문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세 가지로 쪼개서 들여다보자. 육체적 죽음, 정서적 죽음, 영적 죽음이다. 이를 매슬로(Maslow)의 욕구 이론을 빌려 이해해보자. 재앙이 닥치면, 먼저 두 가지 최하위 욕구인 생리적 욕구(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욕 등 포함)와 안전의 욕구(위험과 고통으로부터의 회피욕)가 위협당한다. 이는 육체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유발한다.
한편, 정서적 죽음의 두려움은 타인과의 단절에서 초래된다. 전염되지 않기 위해 타인과 접촉을 피해야 하고 집에 머무르라는 명령(Stay-At-Home Order)에 따라 평소에 가던 모임이나 상점들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 3단계에 해당하는 집단 소속감의 욕구도 해소할 수 없고 4단계 욕구 즉 존경의 욕구도 충족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영적 죽음은 존재 의미에 대한 실존적 자기 가치의 상실로서 최상위 단계(5단계)인 자아 실현 욕구 충족이 불가능하다고 믿게 되는 상황이다. 매슬로는 하위 욕구가 충족되어야 윗 단계의 욕구가 충족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아실현의 욕구를 영적 차원으로 보면 다르다. 영적 생명력은 육체적, 정서적 상태와 상관없이 유지되거나 오히려 강해질 수 있다.
일례로 금식 기도의 경우, 일정 기간 식음을 끊고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과 더 친밀하게 되고 영적으로 더 살아나는 경험을 한다. 금식하는 동안 생리적 욕구는 충족되지 않지만, 오히려 안전 욕구가 충족되고 사회적 애정 욕구나 존경의 욕구 자체는 충족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이 주는 영적 친밀감은 여타 다른 욕구들이 미미하게 느껴지는 신비스러운 현상을 경험하게 한다. 이 신비스러운 현상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일4:18)
사랑하면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순교자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이유가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었지만 대신 굶주린 사자의 먹이가 되기로 자처한 결단이 매슬로의 욕구 이론으로 설명이 되겠는가? 정부의 박해를 피해 사회적 안녕을 등지고 동굴로 들어간 카타콤 신자들은 어떤가? 그들이라고 순간순간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두려움이 왜 없었겠는가? 다만 그럴 때면 하나님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았기 때문에 그러한 믿음의 결단이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코로나(COVID-19) 사태가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해 준 것이 있다. 두려움의 뿌리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뿌리내린 욕심이라는 잡초다. 욕심은 좋은 열매를 막고 두려움이라는 넝쿨을 낸다. 두려움은 마음의 문틈으로 침투하여 주인의 안방까지 차지한다. 지금의 시간은 욕심이라는 뿌리가 낸 두려움의 넝쿨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마음에서 걷어 내야 할 욕심에 주목하게 한다. 그래서 돈과 권력처럼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이 공격받는 시간이다. 욕심이 공격받으니 그만큼 두려움도 크게 느껴진다. 세상의 염려는 개인의 마음에 욕심이 지배하도록 부추기고 하나님 말씀에 순복하려는 의지를 무력화한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마13:22)
욕심이 공격받는 지금이 하나님께 삶의 주도권을 맡겨 드릴 좋은 기회다. 사람들과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며 물리적으로 거리와 함께 정서적 거리도 생겼다. 하지만 사람을 의존하는 인간 중독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직업을 잃은 사람들도 많다. 대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기회다. 심지어 소중한 사람을 사별한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사랑의 빚진 자로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위로를 전할 수 있다. 집에 머물러야 하지만 어느 때 보다 가족과 가까워질 수 있다. 교회 예배당에 가는 것이 자유롭지 않기에 목숨 걸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며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할 기회다.
바이러스 문제로 일어난 모든 문제는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 사랑하자.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자. 사랑이 유일한 해답이다.
정우현 교수(미드웨스턴 상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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